챙겨 온 우비와 우산
가이드의 설명이 어느 정도 끝나갈 무렵, 창밖의 풍경은 출발할 때와는 전혀 다른 표정을 하고 있었다. 기대했던 맑은 하늘은 온데간데없고, 잿빛 구름 아래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대만에 도착해 호텔에 짐을 두고 나올 때까지만 해도 날씨는 분명 맑았다. 언제부터였을까. 가이드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사이, 계절처럼 날씨가 바뀌어 있었다. 조금은 아쉬웠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꽤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여행에서 날씨는 선택할 수 없는 영역이니까. 그저 하늘의 몫이라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비교적 쉽게 받아들였다. 아이들은 아직 그런 감정이 크지 않은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다만 집사람은 달랐다. 우산과 비옷은 호텔 마른 곳, 짐 속에서 쉬는데 우리는 다시 비를 맞아야 한다는 사실에 집사람은 짜증이 났다.
짐을 최대한 줄이면서도 ‘혹시 몰라’ 챙겨 온 우산과 우비. 너무 아까웠다. 결국 우리는 아이들 것만 새로 사기로 했다. 예류 지질공원 입구에 도착하니 우비를 파는 상인들이 여럿 보였다. 가격도 생각보다 저렴했고, 품질 역시 기대 이상이었다. 그렇게 하나씩 위안을 찾다 보니 아내의 표정도 조금씩 풀렸다. 아들은 새 우비가 마음에 드는지 신이 났고, 딸은 색이 마음에 들지 않아 불만을 보였지만 조용히 받아들였다.
재미있는 건, 그날 이후로 그 우비를 다시 꺼낼 일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결국 일부러 챙겨 온 우산과 우비는 여행이 끝날 때까지 가방 속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예류 지질공원의 입구는 여느 공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무 사이로 잘 정돈된 길이 이어져 있었고, 그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목적지에 닿게 되어 있었다. 중간중간 갈라지는 작은 길들도 있었지만, 우리는 큰길을 따라 바다 쪽으로 향했다. 가이드의 간단한 설명이 끝나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약 한 시간. 공원의 규모를 생각하면 충분한 시간처럼 느껴졌다.
많은 여행기에서 읽었던 내용이 떠올랐다.
예류 지질공원의 핵심은 ‘여왕머리바위’.
줄이 길다면 멀리서 사진만 찍고 돌아오고, 짧다면 먼저 사진을 찍고 여유롭게 둘러보라는 조언들. 하지만 ‘짧다’와 ‘길다’의 기준이 어디까지인지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의 줄은… 내 눈에는 짧아 보였다.
그래서 고민 없이 먼저 줄을 서기로 했다.
우리가 줄을 서는 동안에도 앞에 3 팀이 더 늘어났지만, 줄의 길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기다리는 동안 주변을 둘러볼 여유도 있었다. 줄 옆에는 구멍이 숭숭 뚫린 바위들이 가까이 자리하고 있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 가까웠지만, 누구 하나 함부로 만지지는 않았다.
바닥에서 위로 자라난 것처럼 솟아오른 기묘한 형태의 바위들. 같은 원리로 만들어졌지만, 대부분은 그저 수많은 바위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여왕머리바위’만이 특별한 이유는, 그 독특한 형태 때문이기도 하지만 머지않아 무너질 것이라는 사실 때문이기도 했다. 빠르면 3~4년, 길어도 10년 안에는 그 ‘머리’가 다시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이야기.
그리고 그것을 인위적으로 보존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선택.
어쩌면 그 점이 더 많은 사람들을 이곳으로 끌어들이고 있는지도 몰랐다.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 뒤의 줄은 길어졌고, 내 마음은 점점 조급해졌다. 생각보다 줄이 줄어드는 속도가 느렸다. 이유는 단순했다. 기다린 사람들은 사진을 한 장만 찍고 내려오지 않았다. 서로 자리를 바꿔가며 찍고, 단체 사진을 찍고, 개인 사진을 찍고… 한 팀이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우리가 처음 봤던 그 ‘짧아 보이던’ 줄이 줄어드는 데에는 40분이 걸렸다.
우리는 그 줄에서, 주어진 1시간 중 40분을 써버렸다.
마침내 차례가 왔고, 사진을 남겼다. 하지만 셔터를 누르는 순간의 기쁨보다, 남은 시간이 20분뿐이라는 사실이 더 크게 다가왔다. 그 안에 다른 구역을 둘러보고 다시 버스까지 돌아가야 했다. 결국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는 대신, 나오는 길을 따라 다른 바위들을 보기로 했다.
여왕머리바위에서 버스까지는 약 10분 거리. 남은 10분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우리는 빠른 걸음으로 이동했다. 숨이 찰 정도로 걸으며 몇 장의 사진을 더 남겼다. 그리고 다시 시계를 확인했을 때, 남은 시간은 정확히 10분. 그 순간 우리는 선택했다.
더 보려는 욕심 대신, 여유롭게 돌아가기로.
'이래서 대만을 여러 번 오는 걸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직 스펀과 지우펀이라는 일정이 남아 있었고,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리고, 지치지 않는 것도. 그래서 발걸음을 늦췄다.
비는 그 사이에서도 계속 변덕을 부렸다. 세차게 쏟아지다가도 금세 잦아들고, 다시 조용히 내리기를 반복했다. 나와 아내는 결국 우비를 입지 않았지만, 옷이 젖을 정도는 아니었다. 아이들에게 예류 지질공원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해 주려 했다. 하지만 말을 꺼내지 않았다.
딸의 걸음이 느려지고 있었다. 힘들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좋지 않은 신호였다. 앞으로 스펀과 지우펀에서도 꽤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 상태에서 어떤 설명도 아이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나는 말을 아끼기로 했다. 대신 조용히 아이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버스로 향했다.
우리는 새벽 4시에 집을 나섰다.
인천공항을 지나 대만에 도착하고, 다시 예류 지질공원까지 이동하는 여정은 결코 편안한 일정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단 한 번도 짜증을 내지 않았다. 그 사실만으로도,
이번 여행의 시작은 충분히 고마운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