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트라우마 방어
타이베이 메인역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오늘은 미리 신청해 둔 투어에 참여하는 날이었다. 흔히 ‘예스지 투어’라 불리는 일정으로, 예류 지질공원과 스펀, 그리고 지우펀을 하루에 둘러보는 코스다. 1인 약 9천 원. 여행자들 사이에서 가성비 좋은 투어로 알려져 있어 큰 고민 없이 선택했다.
약속 시간보다 15분 먼저 도착했지만, 안내받은 장소에서는 깃발을 든 가이드를 찾을 수 없었다. 주변에도 투어를 기다리는 듯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어딘가 어긋난 느낌이 들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서성이고 있는데, 중국어를 쓰는 몇 사람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투어를 예약했냐는 질문이었다. 그렇다고 답하자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들과 함께 서 있으니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곧, 작은 어긋남이 크게 느껴졌다.
나는 한국어 가이드가 포함된 투어를 신청했는데,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중국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가이드로 보이는 이도 명단을 확인하며 이름을 불렀지만, 내가 반응하지 않자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제야 확신이 들었다.
여기가 아니었다.
나는 짧게 미안하다는 인사를 남기고, 다시 ‘깃발’을 찾아 나섰다. 시계를 보니 약속된 시간까지 채 5분도 남지 않았다. 보통 이 정도 시간이면 누군가는 이미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하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 더 불안을 키웠다.
그때 딸이 갑자기 화장실에 가야 한다고 했다. 잠깐 망설였지만, 지금 다녀오는 것이 맞다고 판단했다. 막상 가이드를 만나고 나면 곧바로 이동해야 할 수도 있었고, 그때 참으라고 하는 상황이 더 곤란할 것 같았다. 혹시라도 버스 안에서 실수라도 한다면, 그 기억은 아이에게 오래 남을지도 모른다.
여행의 일정 하나보다 아이의 편안함이 먼저였다.
아내에게 딸을 데리고 얼른 다녀오라고 하고, 나는 아들과 함께 다시 주변을 살폈다. 정확히 약속된 시간이 되어서야, 깃발을 든 가이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혹시 코리아 타임이 여기에도 적용된 걸까.’ 늦는 사람이 많아 정시에 맞춰 나온 걸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조금만 더 일찍 모습을 보였다면, 방금까지의 불안은 훨씬 덜했을 텐데. 그런 아쉬움이 잠깐 머물렀지만, 곧 안도감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혹시라도 내 실수로 다른 곳에 서 있었다면, 지금쯤 허둥대고 있을 또 다른 ‘나’에게 괜히 말을 걸어주고 싶었다.
“괜찮아, 네가 틀린 건 아니야.”
나는 서둘러 깃발 쪽으로 다가갔다. 마침 그 순간, 아내와 딸도 돌아왔다. 가이드는 “이제 모두 도착했다"라며 이동을 시작했다. 그제야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긴장이 풀리듯 마음이 따뜻하게 내려앉았다.
버스는 겉보기에는 마치 2층 버스처럼 높아 보였다. 하지만 올라가 보니 짐칸이 크게 설계된 구조 덕분에 그렇게 보였던 것뿐이었다. 문제는 좌석이었다. 네 식구가 함께 앉을 자리는 없었다. 다행히 두 명씩 나눠 앉을 수는 있었다. 나는 아들과, 아내는 딸과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버스가 출발하자 가이드는 곧바로 설명을 시작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번 여행을 가이드 투어로 시작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그의 설명을 통해 대만이라는 도시가 조금씩 입체적으로 다가왔다. 왜 이곳의 건물들은 유난히 오래되어 보이는지, 왜 바퀴벌레가 많은지, 영수증에 찍힌 QR코드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사소하지만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기념품으로 사면 좋은 것들, 여행자들이 흔히 겪는 실수, 관광지에서 마주할 수 있는 호객 행위에 대한 조언까지. 생각보다 실용적인 정보도 많았다.
창밖으로는 낯선 도시의 오래된 풍경이 천천히 흘러갔다. 버스 안에는 가이드의 목소리가 잔잔하게 이어졌다. 그제야 비로소,
이 여행이 정말 시작되었음을 실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