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못한 문장이 쌓일 때[15]권태를 잘 챙기는 법

오늘 하루는 어땠나요?

by 유조
불규칙한 수면의 파편 속에서 눈을 뜨자마자 마주한 첫 감정은, 어떠한 특별함도 끼어들 틈 없는 견고한 권태였다. 그저 평온하고 지독하게 익숙한 것. 그래서 감사함을 잃어버린 감정들. 이 오래된 감정의 결을 안고 또 하루를 시작하게 되었다.


두 시간 남짓한 짧은 잠을 마치고 깨어난 아침. 이불속에서 한참을 꼼지락대다 펼쳐본 할 일 목록에는 어제보다 더 늘어난 항목들이 가득해 잠시 멍해졌다. 하지만 실용주의 내향인의 장점은 이 모든 현실을 큰 소동 없이 받아들인다는 데 있다. (물론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즉각적인 행동을 보장하진 않는다. 그건 또 별개의 문제니까.)


점심 이후, 식곤증을 핑계 삼아 텀블러에 커피를 가득 담아 도서관으로 향했다. 노트북을 켜자 검은 화면에 흐릿하게 비친 내 표정이 생각보다 멀쩡해서 피식 웃음이 났다. 겉모습은 잔잔한 수평선처럼 보이나, 수면 아래에선 끊임없이 파도가 치는 내향인 특유의 고요한 이중성이다.


마음속에서는 매일 작은 회의가 열린다. “이걸 지금 꼭 해야 하나?” 그러다 커피 향이 불현듯 코끝을 스치자 회의는 순식간에 종료됐다. 오늘의 권태는 사실 단순한 귀찮음이 아니라, 일상 틈새에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던 정제되지 않은 ‘작은 피로’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결국 하나씩 일을 끝내놓고 보니, 요란한 승전보 대신, 다 마신 텀블러를 탈탈 털어 마지막 한 방울까지 삼키며 바닥을 확인하는 정도의 담담한 마침표면 충분했다. 별다른 성취도, 특별한 전환점도 없었지만 묘하게 뿌듯하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내향인의 회복력은 이렇게 소음 없이, 야단스럽지 않게 작동한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오늘의 감정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온종일 따라다닌 건 고작 작은 전쟁의 귀찮음뿐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런 평범한 날들의 꾸준한 밀도가 삶의 지층을 견고하게 다진다.


오늘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남겨두고 싶다.

"다행이다. 오늘의 권태는 여기서 해제되었고, 내일의 권태는 내일의 내가 묵묵히 잘 챙겨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