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학번 캠퍼스 LOVE STORY ①

- 누구에게나 한 번은 있었을법한 ① 민혁의 이야기 -

by 마민

출근길에 김광석의 '사랑했지만'이 mp3를 타고 흘러 들었다.

12월 11일.. 겨울인데도 부슬비가 슬쩍 흩날리는 기온 6도의 푸근한 날씨에.. 몸을 움츠리지

않아도 되다보니 어느새 출근길 긴장감도 풀려버렸다.

엊그제 16년 아랫 기수 동아리 후배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선배님, 이번 주말 축제 때 저희가 주점을 하는데요 시간 되시면 꼭 나와주세요.

엥? 오랜만에 듣는 동아리 이름과 싱그럽고 어린 여자애의 목소리.. 둘 다 낯설면서도 정겹다.

김광석의 많은 곡은 항상 동방 기타를 생각하게 한다.

너덜너덜해진 동아리곡집 옆에 항상 있던 김광석 기타집을 기억할 때마다 풍기던 오랜 종이내가 함께 떠오른다. 구멍난 쇼파와 어지러운 책상위..

그 위에서 다리 꼬고 앉아서 몇시간이고 쳐댔던 기타..

생각이 꼬리를 물던 차에 큰 소리로 인사하며 들어오던 어린 후배녀석이 떠올랐다.

"안녕하세요"

집안 사정상 학교를 일 년 쉬었던 졸업반 여선배가 이제 갓 들어온 새내기들에게 어려울법도 한데

이 녀석은 참 정겹고 허물없이 다가온다.


-민혁 이야기-

민혁4층.jpg

사실 지금 시간이 많은 것은 아니었다. 동기들은 레포트 때문에 도서관에 간다고 했지만

굳이 필요도 없는 전공책을 동방에 두고 왔다며 4층까지 뛰어올라왔다.

있다! 오늘 못 볼 줄 알았는데 머리 뒤로 햇살을 너무 세게 들어와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내 쪽으로 고개 돌려 '어, 왔니?' 하고 인사해주는 지온이 선배가 있다.

언제나처럼 다리를 꼬고 앉아 기타를 치다가 내 쪽을 보고 인사해줬고 이내 다시 악보를 뒤진다.

'봤다' 아.. 봤으면 됐다. 이제 도서관 가서 자료 찾고 애들이랑 밥 먹은 뒤 레포트 쓰고 수업 가면 되겠다.. 라고 생각했지만

나도 모르게 책상위에 가방을 던져놓고 의자에 털썩 앉아버렸다.

민혁지온기타.jpg

책상에 있는 방명록이 눈에 들어온다. 혹시 선배가 써 놓은 글이 있나 뒤적여 본다.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선배한테 말도 걸어 보고 싶고.. 아.. 나 왜 이렇게 소심한거냐..

방명록을 뒤적이며 읽는 척을 하는데 뒤에서 "여~어!" 하고 해인이형이 들어왔다.

지온선배와 동기이며 이제 복학해서 3학년인 해인이형은 동아리에서 재치있는 말담과 준수한 외모로 항상 주변에 사람을 몰고 다닌다. 들어올 때도 항상 자기가 스타인냥 오른 손을 머리 위로 올려서 크게 흔들며 들어온다..

과연 해인이 형이 들어오자 동방 분위기는 확 달라졌다.

이 사람 저사람에게 장난을 걸고 안부를 묻고 시덥잖은 농담도 툭툭 던져낸다.

"왔냐?" 라는 지온선배의 인사 한 마디에 쪼르르 그 옆으로 가 앉는다.

21기는 동기들끼리 친하기로 유명하다.

그래.. 벌써 4년째 같은 동아리에서 지내고 있는데 당연한 거겠지.

손가락이 작아서 하이코드가 안 잡혀 끙끙대는 지온선배의 기타를 해인이형이 빼앗아 든다.

"야, 새내기!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알아? '광야에서' 알아? 이따 집회 때 불러야 하니 가르쳐주지, 이리와봐.."

아.. 드디어 기회다. 지온선배 앞에 앉을 수가 있게 됐다.

명랑하고 노래 좋아하는 누나는 해인이형의 반주에 맞춰 노래 불러준다.

두꺼운 기타책이 바람에 덮이려고 해서 책 아랫 부분을 손가락을 꾸욱 누르며 고개를 끄덕여 가며 노래를 한다.

나도 살짝 책 윗쪽 부분을 검지로 눌렀다..

악보의 같은 페이지 위에 우리 두 사람의 손가락이 올려져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부분이 미친듯이 술렁인다.

걸리면 안되는데..

이미 레포트니 친구들이니 물 건너 간 지 오래다.

여동기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어~ 민혁? 애들 그냥 식당으로 가던데, 여깄었네?' 라며 아는 척을 한다.

여자애들은 해인이형을 보자 신이 나서 밥을 사달라고 조른다.

형은 사람이 많아져서 신이 났는지 벌떡 일어나선 누나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튕기며 말한다.

'밥 먹으러 가자'

'밥 안 먹었지? 같이 가자 ^^' 라며 바지를 탈탈 털며 일어나며 묻는 지온선배를 따라 나도 일어났다.

바쁜 학과공부 따라가기도 바쁜데 친구놈들이 동아리활동을 하겠다고 했을 때는 별로 탐탁지가 않았지만

과에 남자놈들만 우글대던 차에 항상 술모임과 행사가 많은 동아리길래 심심치 않겠다 생각하고 나도 따르기로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동년배 여자애들과는 편하게 얘기도 못 나누는 내가 스스럼없이 구박하며 말 걸어주는 지온선배에겐 매번 시선이 멈춘다. 여성스러움이라곤 눈곱만치도 없고 단발머리에 항상 청바지만 입고 다닌다.

4학년이라 아주 대선배이긴 하지만 졸업반이라 수업이 얼마 없어서 남는 시간이 많은지 하루에 한번씩은 동방에 들러 후배들을 보고 간다.

쾌활하고 사람 좋아하는 성격은 해인이형과 같아서 그 동기들은 항상 둘을 중심으로 모이는 것 같았다.

해인.jpg

입학 후 한 달 동안 정신없이 학교생활에 적응하는 동안에 어느새 3월말인데.. 어느새 이 누나의 얼굴을 한 번도 못 보고 집에 돌아가는 날에는 괜시리 허전하고 서운한 마음이 들어 헛헛해지곤 했다. 내가 왜 이러지?



4월이 시작되었다.

'민혁아, 오늘 저녁에 별 거 없지? 30기 술모임 있데. 지온이누나 생일이라던데? 너도 올거지?'

'지온선배 생일? 어디서 하는데? 나 과 스터디에서 뒷풀이 있긴 한데 끝나고 갈 수 있도록 해볼께'

하필 오늘 빠질 수 없는 모임이 있다.

어떻게든 둘러대고 일찍 나와야지 하는 생각과 동시에 '오늘 생일이구나, 선물도 해야 하나?' 로 고민을 하고 있다.

의외로 과모임에서 술을 많이 마셨다.

신입생이라고 부어주는대로 퍼 마시다가 비틀거리며 나와버렸다.

많이 마셔서 안 좋은가 보다 하고 동기들도 더 잡진 않고 놔줬다.

정신이가 동아리 모임 가는 거면 자기도 좀 빼서 같이 가자며 민혁이 팔뚝을 부축하고 나왔다.

호프집을 나왔는데 인형뽑는 기계가 눈에 들어온다.

유독 인형뽑기 안에 있는 손바닥만한 곰인형이 눈에 보인다.

노란색 곰돌이는 두 손에 빨간 하트쿠션을 소중하게 들고 있다.

쿠션 속에 써 있는 'i love U' ..

곰인형.jpg

휘청거리는 주변 그림 사이에서도 저 곰녀석만 점점더 크게 눈에 들어온다.

자동으로 가는 발걸음..

"야, TAKE에 있데, 이 쪽으로 가야지. 어디가?"

'나 인형뽑기 놀이 좋아한다, 조금만 기다려봐, 금방 뽑을 수 있어.'

실패, 실패, 실패..

우씨!! 누가 이기나 두고보자..

한 번 더!!

앗싸!! 그럼 그렇지.. 니가 안 나오고 버텨?

노란 곰돌이 녀석을 뿌듯히 손에 쥐고 먼저 토낀 정신이놈한테 전화했다.

"어디냐?"

"호수 벤치로 와, 여기 난리났다"

선배들의 술자리는 이미 끝났고 생일마다 벌어지는 이벤트로 호수에 생일인 사람을 빠뜨리는 놀이에 저 쪽 호수쪽이 벌써 사람들로 왁자지껄하다.

지온선배 생일인데 호수에 빠졌다 나와서 물에 쫄딱 젖어 있는 것은 이상하게 해인이형이다.

'흑기산가? 그거 나도 할 수 있는데.. '

해인이형이 손에 걸리는 놈들마다 호수로 집어 던지느라 뭉쳐있던 사람들이 일순간에 와~아 하고 흩어진다.

'어? 민혁이 왔어? 왜 이렇게 늦었어? 너도 안 빠질려면 일단 나무 뒤에 숨어 있든지 도망가든지 해야 할거다."

얼굴이 발게진 지온선배가 나를 발견하고 다가오며 말하더니 수진이누나를 보고 눈이 동그래져서 소리지른다.

"야! 수진이가 애들 지갑 다 갖고 있어! 수진이 빠뜨리면 안돼!!! 미쳤나바'

다른 때보다 목소리가 한 톤 더 높이 상기되어있다.

"아, 저기.선배님!"

"응?"

"이거.. 오는 길에 인형뽑는데가 있길래 해봤는데요, 이게 됐어요. 생일이니까 드릴께요."

'워~ 너 남자가 인형뽑기도 하냐? 여튼 나 오늘 생일 선물 처음 받았네? 하핫. 고맙다~'

멋적어 할 세도 없이 갑자기 누가 목덜미를 잡아챘다.

누구야?! 헉! 해인이형이다. 힘이 왜 이렇게 쎈거야.

질질 끌려가는 나한테서 지온선배는 가방을 낚아채간다.

"누나.. 살려줘야지.. 그것만 가져가면.. 헉!"

풍덩!!

"젠장..오늘도 집에 가긴 글러먹었군.."

갈아입을 옷도 없는데 망했다.. 킁킁.. 이 거 호숫물이 더러운가봐.. 비린내도 나는 것 같다.

한바탕 빠뜨리고 도망가고 또 빠지고 물장난질을 하다가 지치고 나서야

자연스레 사람들이 동방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화장실에서 대충 씻고 나와 자취하는 정신이네로 가기로 했다.

동방에 들어오니 지온선배는 없다.

어?! 벌써 가신건가? 아.. 벌써 10시가 넘긴 했구나..

근데 분명 같이 빠졌던 해인이형도 어딜 갔는지 보이지가 않는다.

아씨. ... 근데 이 물 뭐야.. 몸이 근지럽기 시작했다..



중간고사 기간이 다가왔다.

이놈의 물리, 수학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

범위도 많고 C-언어는 수업을 몇 번 안 갔더니 엄두도 안 나네.

오늘부터 도서관 24시간 개방을 시작한다.

친구놈들이랑 밤 한 번 새보기로 했다.

"야, 상진이형이 족보 동방에 둔다고 했는데 얼렁 올라갔다 와라"

"임마, 왜 내가 가. 너가 갔다와"

"야, 쪽팔리게 가위바위보할래? 그냥 갈래?"

"아~ 새끼. 여기 있을거야?"

"나 가서 자리 맡아놓고 있을게 글로 와. 3층 열람실에 있을게"

늦은 시간 동방에 올라갔는데 왠걸 불이 켜져있다.

어? 혜린이 선배와 지온이 선배가 왜 여기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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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안녕하세요..'

'민혁아~ 이 시간에 왠일이야?"

"아직 집에 안 가셨어요? 늦었는데?"

"우린 오늘부터 졸업작품 만드느라 못 가고 있어.여기서 밤새야 할 것 같은데?"

" 어? 저도 내일 시험인데 도서관 자리 없어서요, 여기서 할려고 왔어요'"

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아~놔 .. 미치겠네..


이 시간에 이렇게 조용한 가운데 동방에 있어보긴 처음이다.

지온선배는 창 밖으로 몸을 비틀고 앉아서 야경에 심취해있다.

호숫가에는 가로등이 그대로 반대로 비추고 있고 노란 불을 내뿜고 미끌어지듯 지나가는 전철은 호수위에도 거꾸라진채로 흘러간다.

그걸 황홀한 듯이 보고 앉아있다, 저 누나는..

평소엔 잘 넘어지고 괄괄하더니 지금 이 시간만은 소녀같다.

새벽 두시..

2인용 쇼파에서 누나가 쪽잠을 자고 있다.

아담하고 작은 체구라 쇼파에 다리를 구겨 넣어 웅크리면 꼭 맞는다.

아. 미치겠다, 글자가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꼼꼼히 그녀를 쳐다볼 수 있는 기회잖아.

이마, 눈썹, 눈, 코.. 그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는 동안 8평 남짓되는 동방이 온통 하얗고 그녀와 나만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작은 동방이 내 심장과 함께 같이 쿵쾅거린다.

그래도 이렇게 보고만 있어야지.. 가까이 가서 얼굴위로 흐르는 머리카락 한 올도 귀 뒤로 넘겨줄 수 없잖아, 지금은..

결국 5시가 되도록 공부도 못했고 잠은 더더욱 못 잤다.

그리고 오늘 시험은 망쳐버렸다.



어제 술도 마셨고 물에 빠진 동기들이 죄다 정신이네서 겹쳐 잔 바람에 허리도 아프고..

아침수업 땜에 이 시간까지 있긴 하지만.. 오늘 진짜 피곤하다.

오후 수업은 그냥 땡땡이 칠까보다.

밖에서 웅성웅성 꺄르르 소리가 들린다.

안녕~ 하고 여동기들이 들어온다. 어? 너희들만 있어?

머냐? 그럼 또 누가 있길 바라는 거냐?

"해인이 오빤 혹시 못 봤어?"

"오늘 못 봤는데? 하루 종일 수업일걸 오늘? 왜 맨날 그 형만 찾냐 너희들은?"

"아니.. 어제 물에 빠지기 전에 나한테 시계 맡긴 게 있는데 이거 돌려줄려고 그러지"

"책상 위에 놔. 자기 건지 알면 가져가겠지"

"싫어.. 직접 줘야지, 잃어버리면 무슨 원망을 들을려고"

"그럼 이따 지온이누나 오면 주면 되겠네."

"근데 이 시계 이쁘다. 그냥 주기 아까운걸? 보관료로 커피라도 얻어마셔야지"

"해인이형 시계를 왜 지온이누나를 줘?" 이해가 안되는 소리를 하길래 내가 물었다.

"뭐야, 왜긴 왜야. 둘이 CC라 매일 붙어다니니까 그렇지, 몰랐냐?"

쿵! 하고 가슴속에서 뭔가가 떨어진 것 같다.

병원 가야 하나? 정말 가슴속에서 지진이 일어나서 내장들이 발바닥 밑까지 툭툭 끊어져서 떨어지는 기분이다.

"누가 그래? 난 처음 듣는 소린데?"

"누가 그러긴, 그냥 처음부터 다들 아는 걸 혼자 몰랐어? 그걸 말할 때까지 모르는 니가 더 웃기다"

"야, 니들도 괜히 임자있는 남자한테 고만 찝적거리고 시계 그냥 책상위에 두고 가"

"찝적은 좀 그렇다? 우리가 언제..."

"솔직히 우리랑 밥 먹은 거 보다 해인이형이랑 먹은 게 너네 더 많을걸?"

"그럼 너네도 밥 좀 사보덩가~"

자기들끼리 재잘거리며 싸우는 소리가 귀에서 웅웅거리긴 하는데... 난 .. 여전히 아무말도 못하겠다.

왜 나만 몰랐지?

남자놈들은 같이 있어도 그런 소리야 하지 않으니까 몰랐겠고..

아차차.. 내가.. 항상 지온선배 옆에 있었구나... 당연히 선배 앞에서 그런 소리 하는 사람이 없었구나..

시끌시끌 싸우더니만 정신이가 밥 사기로 우르르 일어나 나가려고 한다.

정신이는 '야! 야!.. 빨랑 나와, 오늘 내가 덤탱이 쓰게 생겼다." 라며 문 앞에서 소리지른다.

"나 그냥 집에 갈란다.. 피곤해.. 가라"


☞ 다음 이야기 ② 지온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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