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바깥에서

단편소설 16

by 최지윤

ㅡ버스가 멈추자 먼지 낀 공기가 뿌옇게 흩어졌다.

정거장에는 수십 명의 사람이 서 있었지만, 아무도 떠나는 기색은 없었다.매파 노인이 다가와 말했다.

“짝을 찾으러 왔지?”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 순간부터 세상의 냄새가 달라졌다.

바람이 말라 있었고, 사람들의 눈빛 속은 텅 비어 있었다.


그는 알지 못했다. 이 마을에선 사랑이 완성되는 순간, 모든 것이 사라진다는 걸. 그리고 그때, 어딘가 낯익은 기시감이 스쳤다.


그는 분명 처음 온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늙은 여자는 마치 오래된 사람을 맞이하듯 말했다.


“또 돌아왔구나.”


그는 마을로 들어섰다.

길가에는 이름 모를 꽃들이 바람에 따라 고개를 숙였다. 색은 분명 붉었지만, 빛을 잃은 듯 탁했다.

사람들은 서로를 껴안고 웃었으나, 그 웃음이 끝나면 금세 낯선 얼굴로 돌아섰다.


누군가의 품속에서 막 빠져나온 이가 또 다른 손을 잡았고, 그 손이 떨어지는 순간 공기가 약간 흔들렸다.

“이곳에선 누구나 만인의 연인이 될 수 있어.”

매파 노인의 음성이 바람에 섞여 들려왔다.

그는 뒤돌아보았지만,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멀리에서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 웃음은 이상하게 오래 남아 귓속을 간질였다. 광장의 한가운데엔 커다란 시계탑이 서 있었다.

시계는 멈춰 있었지만, 그림자는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잠시 발을 멈춘 채 그 그림자를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멈춰 있는 것이 시간일까, 아니면 나일까.’


그때였다. 광장 맞은편에서 한 여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모든 시선이 교차하던 그곳에서, 단 하나의 시선만이 조용히 머물러 있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처럼 웃지 않았고, 누구의 손도 잡지 않았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 사이로, 잠깐 그가 어디선가 본 듯한 눈빛이 스쳤다.

그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이상한 그리움을 느꼈다. 그리고 그 순간, 시계탑의 종이 한 번 울렸다.멈춘 세계가 아주 살짝 흔들렸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으나, 그는 어떤 시작이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그 눈빛, 또 누굴 닮았군.”

뒤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천천히 돌아섰다. 매파 노인은 얼마 전과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미소가 없었다.

“이 마을의 사람들은 모두 사랑을 찾아왔지.”

노인은 마른 손으로 공기를 쓸어내리듯 말했다.

“하지만 사랑을 찾은 사람들은 오래 머물지 못해. 그게 이곳의 약속이야.”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떠난다는 건… 어디로요?”

노인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정거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들이 떠나는 곳은 기억의 바깥이지.”

그녀의 음성은 바람보다 낮았고, 이상하게도 차가웠다.

“바깥에 나가면, 그들은 서로를 기억하지 못해.

그래도 가겠다고 손을 잡는 게 인간의 사랑이란 거야.”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말이 농담인지, 혹은 저주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노인은 그를 향해 한 걸음 다가왔다.


“네가 만약 그 문턱에 선다면, 기억해. 사랑이 완성되는 순간, 이름은 사라진다는 걸.”

그 말을 남기고 노인은 다시 군중 속으로 사라졌다.

남겨진 바람 속엔 먼지와 함께 묘하게 달콤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는 무심코 그 냄새를 들이마셨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광장 맞은편의 여자가 다시 그를 바라보는 걸 보았다.

이번엔 그녀의 입술이 조금 움직였다.

그러나 바람이 그 입술의 말을 모두 지워버렸다.


그는 노인의 말이 남긴 서늘한 여운을 떨쳐내지 못한 채 광장을 가로질렀다.

시계탑의 그림자가 조금 더 길어져 있었다. 시간을 알 수 없는데도, 해가 기우는 소리 같은 것이 느껴졌다. 광장 끝, 돌담 아래 그녀가 서 있었다.

방금 전까지 그를 바라보던 그 눈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누구의 손도 잡지 않은 채, 마을과 조금 떨어져 서 있었다. 마치 이곳에 속하지 않는 사람처럼. 가까이 다가가자, 그녀가 먼저 말했다.


“처음 오셨어요?”

목소리는 낮았고, 어디선가 들은 적 있는 음색처럼 가슴 한쪽을 건드렸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 것 같다’는 말이 스스로도 이상하게 들렸다. 분명 처음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입안에서 그 단어가 잘 굴러가지 않았다. 그녀가 미세하게 웃었다.


“다들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다들요?”


“여기 오는 사람들. 대부분 처음이라고 해요. 그런데 눈을 보면, 꼭…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가늘게 떨리는 속눈썹, 말라 있는 듯하지만 맑은 홍채, 어딘가 오래전 약속을 기억하는 사람의 눈.

그는 입을 열었다가, 금세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대신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여기 오래 계셨어요?”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광장 위로 떠 있는 하늘은 맑았지만, 색이 조금 바랜 사진 같았다.


“글쎄요.”

그녀가 천천히 말했다.

“얼마나 있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여기선… 시간이 좀 엉켜 있어서.”


그는 웃으려다 말았다. 농담처럼 들렸지만, 농담 같지 않았다.

“그래도 떠난 사람들은 부러워하지 않나요? 짝을 찾아서 나가는 거잖아요.”


그녀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떠난 사람은, 여기서 아무도 기억하지 못해요.”


“아무도요?”


“네. 이름도, 얼굴도. 그냥 ‘떠난 사람’이라고만 남아요.”


어디선가 아까 들었던 말과 겹치는 느낌이 들었다.


기억의 바깥.


그는 무의식적으로 정거장이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먼 곳에서 버스의 실루엣 같은 것이 잠깐 흔들렸다가, 이내 안개처럼 사라졌다.


“그래서 저는, 아직 여기 남아 있는 걸지도 몰라요.”


그녀가 덧붙였다.


“아무도 떠난 사람을 기억하지 못하니까... 누군가는 남아서 그 빈자리를 기억해야 할 것 같아서.”

그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이해한 것처럼 느꼈다.


그녀의 말 하나하나가,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의 모양으로 가슴에 박혔다.


“그럼 당신은, 짝을 찾고 싶지 않은 거예요?”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어 그녀의 머리칼이 그의 얼굴 근처까지 흘러왔다가 스쳤다.


향기가 났다. 어디선가, 아주 오래전에 맡아본 적이 있는 냄새였다.


“모르겠어요.”

그녀가 말했다.


“어쩌면 한 번은… 찾았을지도 모르죠.”

그는 가슴이 순간 비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자신에게 한 말을, 그녀가 대신 말해준 것처럼. 그때, 시계탑의 멈춘 초침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가 다시 멈췄다.


그는 그것을 분명히 보았다.


그러나 말하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물었다.


“여기서는… 누가 누구의 짝인지, 어떻게 알 수 있죠?”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속에서 바람이 돌담 위를 넘고, 먼지와 마른 꽃잎을 굴렸다. 한참 뒤, 그녀가 짧게 말했다.


“손을 잡아 보면 알아요.”

그 말은 단순했지만, 이상하게도 예언처럼 들렸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아주 잠깐, 그녀의 손등이 그 옆에 겹쳐지는 상상을 했다. 그 순간, 매파 노인의 목소리가 어디선가 흘러들어왔다.


“기억해. 사랑이 완성되는 순간, 이름은 사라진다는 걸.”


그는 눈을 감았다 뜨며, 그 말을 마음속 깊은 곳으로 밀어 넣었다.

마치 아직 읽지 않은 편지를 서랍 맨 아래에 넣어두듯이.


며칠이 지났다.

아니, 며칠인지 알 수 없었다. 시계탑은 여전히 멈춰 있었고, 마을의 낮과 밤은 서로를 삼키듯 이어졌다. 그는 매일 광장을 지나다 그녀를 찾았다.

처음엔 우연인 척, 나중엔 일부러 발걸음을 느리게 하며.


그녀는 늘 같은 돌담 아래 서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손을 잡지 않은 채.

그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가슴속에 오래된 파문이 일었다. 어느 날, 그녀가 먼저 다가왔다.


“여기서 뭐 하세요?”


그녀의 물음은 가벼웠지만, 눈빛은 아니었다.

그는 솔직히 말했다.


“당신을 찾고 있어요.”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당신을 기다린 것 같아요.”

그 말에 그는 숨이 멎는 듯했다. 기다린다는 말은 이 마을에서 금기어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그녀의 입에서 나오니, 자연스러웠다. 그들은 광장 가장자리의 오래된 나무 벤치에 앉았다.

주변에서 사람들이 웃고 손을 잡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 소리는 멀었다.


두 사람 사이엔 작은 침묵이 고였다. 그 침묵이 오히려 편안했다.


“왜 여기 왔어요?”

그녀가 물었다.


그는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짝을 찾으려고요. 바깥세상에서… 혼자였어요.”


“나도 그래요.”


그녀가 손끝으로 돌담을 쓸며 말했다.

“바깥에선 너무 시끄러웠어요. 여기 오니까 조용해지더라고요. 그런데 이상하게, 당신을 보자 그 조용함이 깨지는 기분이에요.”

그는 그녀의 손을 보았다. 가느다란 손가락, 아직 누구의 손과도 맞물리지 않은 손.

그 손이 자신을 향해 서서히 열리는 상상을 했다.


“기억나세요? 처음 본 순간… 눈이 마주쳤을 때.”

그가 말했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네. 마치… 다시 만난 것 같았어요. 잊고 있던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그날부터 그들은 매일 만났다.

광장에서, 나무 아래서, 마을의 좁은 골목에서.

말은 점점 줄었고, 시선은 길어졌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그의 귓가에만 머물렀고, 그의 손끝이 그녀의 어깨에 스칠 때마다 공기가 따뜻해졌다.


어느 저녁, 시계탑 그림자가 길게 드리울 때였다.

그녀가 말했다.


“당신이랑 있으면, 시간이 흘러가는 게 느껴져요. 이 마을에선 처음이에요.”


그는 대답 대신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자연스럽게, 망설임 없이. 그 손이 맞닿는 순간, 세상이 선명해졌다.

바람이 멈췄고, 먼지조차 공중에 떠 있었다.

그녀의 손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오래전 쥐었던, 잃어버렸던 무언가의 온기였다.


“이게… 짝인가 봐요.”

그녀가 속삭였다.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이었다.

진짜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이 완성되는 순간, 멀리 정거장에서 버스의 엔진 소리가 희미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버스의 엔진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들은 손을 잡은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비친 그의 얼굴은 처음 본 순간보다 더 선명했다. 이제야 알았다.


이게 진짜 짝이었다. 서로를 향한 끌림이, 이 마을의 모든 자유로운 관계를 뛰어넘는 사랑이었다.

“당신이… 내 짝이야.”

그가 먼저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가 손을 더 세게 쥐었다.


“나도 알아. 처음부터 알았어. 다시… 만난 거야.”


그 말에 가슴이 터질 듯 벅찼다. 마을의 공기가 갑자기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시계탑의 초침이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움직였다. 그때였다.

광장 저편에서 매파 노인이 천천히 다가왔다.

쭈글쭈글한 얼굴에 새겨진 주름 하나하나가 오래된 시간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매서웠고,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찾았구나.”

노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광장 전체를 울렸다.

사람들이 조용히 물러서며 길을 터주었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린 듯했다. 그는 손을 놓지 않은 채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규칙이야. 짝을 찾은 자들은 떠나야 해.

버스를 타고 정거장을 지나. 그 문턱을 넘으면, 새로운 시작이 기다리지.”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기억은요? 우리 사랑은?”


노인의 눈이 잠시 부드러워졌다가 다시 날카로워졌다.


“말했잖니. 사랑이 완성되는 순간, 이름은 사라져.

정거장을 지나 버스가 흔들릴 때, 너희는 서로를 잊게 될 거야.

그게 이 마을의 약속이야. 진짜 사랑은… 기억의 바깥에서 완성된다는 거지.”


그들은 서로를 보았다.

기쁨이 공포로 물들었다.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이제 곧 사라질 운명이었다.


“그럼… 왜 이런 마을이 있는 거죠?”


그가 반항하듯 물었다. 노인이 먼 정거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인간이 사랑을 갈망하기 때문이야.

기억 없이도 다시 찾아오는, 그 덧없는 본능 때문이지.

가거라. 손을 놓지 마.”


버스의 엔진 소리가 바로 코앞에서 울렸다.

노인은 뒤로 물러섰다.


그들은 손을 꼭 잡고 정거장을 향해 걸었다.

마을 사람들이 멀찌감치 서서 지켜보았다. 그들의 눈빛에는 부러움과 슬픔이 뒤섞여 있었다. 정거장에 도착했을 때, 버스 문이 열려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한 번 더 새기려 애썼다.


“사랑해.”

동시에 속삭였다.

문이 닫히고, 버스가 출발했다.

버스가 정거장을 지나려는 순간, 세상이 흔들렸다.

그녀의 손이 서서히 투명해지며 빠져나갔다.


“안 돼!”

그가 외쳤지만, 그녀의 얼굴은 이미 안갯속으로 녹아들었다.

마지막으로 들린 건, 바람에 섞인 속삭임.

“다시… 찾아…”

버스 안은 텅 비었다.

그녀의 흔적은 사라졌고, 가슴속엔 커다란 구멍만 남았다.

왜 여기에 있는지, 누구를 기다리는지 알 수 없었다.

사랑의 기억은 대부분 지워져 있었다. 버스가 다시 멈췄다.

그는 무작정 내렸다.

먼지 낀 공기가 뿌옇게 흩어졌다. 매파 노인이 다가와 말했다.

“짝을 찾으러 왔지?”그는 고개를 끄덕이려다 멈칫했다.

가슴 한구석이 욱신거렸다.

어떤 손의 온기, 어떤 눈빛의 잔상.

설명할 수 없는 그리움이 치밀었다.


또 돌아왔구나.”

노인이 덧붙였다. 그는 대답 대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방금 전까지 쥐고 있던 무언가가 있었다.

손바닥에 남은 건, 그녀의 손톱에서 떨어진 아주 작은 꽃잎 한 조각.

붉었지만 빛이 바랜, 마을에서만 볼 수 있는 꽃잎. 그는 그 꽃잎을 조심스레 쥐었다.

망각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은 유일한 증거.

“네,”

그가 말했다. 목소리가 단단했다.

“찾으러 왔습니다.”이번에는 알았다.

적어도 어디로 가야 하는지.

누구를 다시 만나야 하는지.

시계탑이 멀리서 한 번 울렸다. 하지만 그는 꽃잎을 더 깊게 움켜쥐었다. 이번에는 아무도 그를 멈추지 못했다.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글이 여러분의 하루에 울림을 주었기를 바라며 응원은 힘이 됩니다

앞으로 이 시리즈는 단행본 기억의바깥에서 연작시리즈로 계속 만나실 수 있습니다

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