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파문

단편소설 17

by 최지윤

첫사랑이 돌아왔다.

왜 돌아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의도도 궁금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 여겼던 첫사랑이 아무 예고도 없이 그녀 앞에 나타나버렸으니 말이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녀의 가슴에는 작은 파문이 일었고, 조용하던 일상에는 미세한 일렁임이 번져갔다. 그녀는 이제 와 그런 흔들림을 느끼는 자신이 싫었다.

그 감정이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사랑에 대한 배신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렘을 느꼈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것은 변명할 수 없는, 하나의 사실이었다.


그녀는 권태에 가까운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오래 이어진 연애는 특별한 문제없이 흘러가고 있었고, 두 사람은 다투지 않는 법에 익숙해져 있었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이, 확인할 필요가 없는 관계. 평탄함은 안정이었고, 동시에 미묘한 무감각이기도 했다.


그에게도 유혹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몇 번쯤 그것을 눈치챘다. 그러나 그는 흔들리지 않았고, 그 사실을 숨기지도 자랑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아무 일 아니라는 듯 넘겼다. 그녀는 그 태도를 신뢰했고, 이 사랑이 생각보다 단단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래서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균열이 상대가 아니라, 자신에게서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그날도 별다른 목적 없이 휴대폰을 넘기고 있었다. 알고리즘은 늘 그렇듯 무심했고, 그녀는 화면을 습관처럼 아래로 내렸다. 그러다 우연히, 정말 우연히 그의 이름을 보았다.


찾고 싶어 찾을 때는 끝내 나타나지 않던 사람이, 하필 이런 시기에, 마치 여봐라 하고 내밀 듯 눈앞에 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정치 현안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 자신이 옳다고 믿는 편에 서서, 단정한 문장으로 의견을 밝히고 있었다.


댓글 창에는 동의와 반박이 뒤섞여 있었고, 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짧은 문장을 남겼다.

역시 여전하네.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보여, 다행이네.


보내고 나서야 심장이 조금 빨라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너무 늦지도, 너무 빠르지도 않은 문장이었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면서.


잠시 후 그의 공개 답글이 달렸다.

여전하다는 말이 이상하게 고맙네.

잘 지내고 있어. 너도 그래 보여.


그날 밤, 그녀는 그 문장을 몇 번이나 떠올렸다. ‘여전하다’는 말이 칭찬이었는지, 거리 두기였는지 스스로에게 묻다가 잠들었다.

다음 날 그의 DM이 도착해 있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다.

늘 같은 쪽에 서 있는 게 좋은 건지도 가끔은 헷갈리는데, 그래도 여전하다는 말은 힘이 되네.

네가 잘 지내고 있다니 그걸로 충분해. 괜히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어.


그는 여전히 연상의 오빠였고, 여전히 선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다가오지 않는 태도는 안심을 주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 한쪽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방해’라는 단어가 오래 남았다.


배려였지만, 이미 그어져 있던 선을 또렷하게 만드는 말이기도 했다.


그녀는 답장을 쓰지 않았다. 쓰지 않기로 한 선택이었는지, 쓰지 못한 결과였는지는 분간할 수 없었다. 대신 휴대폰을 내려놓고, 저녁에 도착한 연인의 메시지에 짧게 답했다.


응, 나도.


그러다 문득, 오래된 기억 하나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원하지 않았지만 막을 수 없었던, 그와 처음 연애를 시작하게 된 계기였다.


인터넷 동호회 안에는 이미 주류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서로의 닉네임에 익숙했고, 그들이 글을 올리면 조회 수와 댓글은 자연스럽게 그들 쪽으로 쏠렸다.


그녀의 글은 그 사이에 스며든 작은 흔적에 가까웠다. 눈에 띄지 않았고, 중심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 그에게서 온 DM 한 통이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다. 글에 대한 짧은 의견과 질문 하나. 익명의 공간에서는 자유로웠던 그녀였지만, 얼굴을 드러내야 하는 오프라인 모임이 다가오자 묘한 긴장이 따라붙었다.


‘나는 아직 아무것도 아닌데…’


그런 생각이 스쳤지만, 그의 글을 직접 보고 싶다는 마음이 조금씩 그녀를 밀어 올렸다.


오프 모임에서 상황은 미묘하게 달라졌다. 온라인에서는 눈에 띄지 않던 그녀가, 현실에서는 이상하리만큼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 사실을 그녀 자신은 잘 알지 못했다. 다만 그 자리에서 그녀의 시선은 오직 한 사람에게만 머물렀다.


그가 바로 xx였다.


키는 크지 않았고, 겉모습은 평범했지만 남자다움과 지적인 분위기가 묘하게 겹쳐 있었다. 술잔을 들고 다가와 좋아하는 영화와 감독을 묻고, 조용하지만 날카로운 질문으로 대화를 이끌어가는 그의 모습에 그녀는 점점 빨려 들어갔다. 토론을 좋아하던 그녀에게 그는 완벽한 자극제였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평소의 자신이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을 했다. 그가 전화번호를 묻자, 거의 생각할 틈도 없이 자신의 번호를 건넸다. 초겨울 공기 속에서 설렘과 긴장이 손끝에 남아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다. 잠시 후 울린 휴대폰, 화면에 뜬 그의 이름. 짧은 인사로 시작된 대화는 영화와 취향으로 이어졌고, 그녀는 메시지 하나에도 웃음을 터뜨렸다. 익명 속에서만 알던 글쟁이가 현실 속에서 마음을 훔치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그때 알아차렸다.


며칠 뒤 둘은 술을 마셨고, 그녀는 또 한 번 자신답지 않은 선택을 했다. 다음 날 아침, 기억은 희미했지만 옆에 있는 사람의 존재만은 분명했다.


“정말… 너 같은 사람이 내 옆에 누워 있는 게 꿈만 같아.”

그의 말에 그녀는 놀랐고, 동시에 이상하게 안도했다.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긴장과 설렘이 그 순간 그들 사이에 놓여 있었다.


첫사랑이었다.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그녀는 다시 현재로 돌아왔다. 휴대폰은 조용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은, 더 이상 사랑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돌아온 것은 그가 아니었다.

그때의 자신이었다.

누군가의 확신에 설레고, 삶을 선명한 편과 흐릿한 편으로 나누던 시절의 자신. 사랑을 선택이라기보다 운명에 가깝게 믿던, 아직 책임보다 감각이 앞서 있던 자신이, 하필이면 이 평탄한 시기에 불쑥 고개를 내민 것이다.

그녀는 그 사실이 조금 슬펐다.


지금의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지금의 자신이 충분히 단단해졌다는 증거 같아서였다. 더 이상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흔들릴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선택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창을 닫자 타임라인은 다시 조용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알았다.

이 일렁임이 누군가를 향한 시작이 아니라, 한 시절을 잘 보내주기 위한 마지막 인사라는 것을.


그녀는 처음으로,

첫사랑을 떠나보낸 것이 아니라

그를 사랑하던 자신을 제대로 놓아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 곁에는 라면을 끓여 주고 싶은 남자가 있다.


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