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동승자 2

단편소설 18

by 최지윤

2장 검사와의 조우


경석이 박스를 내려놓고 사무실을 나왔을 때는 아직 해가 완전히 뜨기 전이었다.

골목 끝, 버스 정류장 쪽으로 차들이 몇 대 더 들어와 서 있었다.


경찰 마크가 붙은 승합차, 옆에는 아무 표시 없는 검은색 세단이 하나 붙어 있었다.‘단속인가.’ 그는 목까지 올라온 지퍼를 한 번 더 끌어올리고, 모자를 눌러썼다.


담배를 물까 하다가, 괜히 귀찮아질 것 같아 그냥 주머니에 넣었다. 정류장 쪽으로 몇 걸음 옮겼을 때였다.


“저기요. 잠깐만요.”


길가에 서 있던 형사가 손을 들었다.

형사의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길게 내려와 있었고, 노란 조끼 위에 패딩이 덧입혀져 있었다. 경석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섰다.

형사가 다가오며 말했다.


“신분증 좀 보고 갈게요.”


이럴 때는 튀지 않는 게 제일이다.

경석은 말없이 지갑에서 주민등록증을 꺼냈다. 형사가 카드 뒷면까지 한 번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 “○○구 ○○동… 고시원 사시네.”


말투는 가볍게 던지는 농담 같았지만, 눈은 카드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형사는 무전기를 귀에 대고 누군가에게 짧게 숫자를 불러줬다. 경석은 그 사이 슬쩍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조금 떨어진 곳, 검은 세단 옆에 정장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패딩도 안 입은 채, 얇은 코트를 걸치고 서류를 넘겨보는 중이었다.


‘저게… 검사겠지 뭐.’


뉴스에서 가끔 보던, 그 ‘검찰 쪽 사람’들 얼굴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깨끗한 구두, 너무 얇아 보이는 바지, 추운 티를 안 내려고 애쓰는 어깨.


“회사 다니세요?”


형사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경석이 고개를 돌리자, 형사가 그의 손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명함, 거기 있네.”


아침에 부두목이 집어준 명함 몇 장이, 그의 손에 그대로 쥐어져 있었다.

경석은 그제야 자기 손을 한 번 내려다봤다


. “예. 회사… 다니죠.”


형사가 명함을 하나 받아 들었다.

로고와 회사 이름을 눈으로 읽는 사이, 뒤쪽에서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 “잠깐만요.


정장 남자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검은 코트 자락이 바닥을 스치면서 흔들렸다. 형사가 허리를 반쯤 숙였다


. “검사님.


검사. 단어가 실제 얼굴과 붙는 순간이었다. 남자는 형사 손에 들린 명함을 받아 들었다.

얇은 장갑을 낀 손가락이 글자를 따라갔다


. “○○파트너스…


입 안에서 한 번 굴린 이름이었다.

눈매가 아주 조금 가늘어졌다


. “이쪽은?


검사가 고개를 들어 경석을 봤다.

멀리서 얼핏 보던 얼굴이, 가까워지자 더 평범해 보였다.


“심부름 다녀오는 길이라 하십니다.”

형사가 대신 설명했다. 검사는 잠깐 형사를 보고, 다시 경석에게 시선을 돌렸다


. “심부름이요.

그 한 단어만 또박또박 되뇌었다.


“예.”


경석의 대답은 짧았다


. “누구 심부름입니까?”


“회사 심부름이죠, 뭐.”


검사는 명함을 한 번 더 내려다봤다


. “이 회사에서요?”


경석은 잠깐, 부두목이 웃으며 명함 꾸러미를 던지던 장면을 떠올렸다.


‘명함 몇 장 챙겨라.’


어디에 쓰는 건지, 누구에게 주는 건지, 아무도 설명해 준 적이 없다


. “예. 거기… 이름 올려놨으니까요.”


애매한 대답이었다.

검사는 그 애매함을 놓치지 않았다


. “직책은요?


“직책 같은 건 없고… 그냥 시키는 거 합니다.”


검사가 고개를 아주 살짝 기울였다


. “오늘은 뭘 시키던가요.”


조용한 질문이었다.

형사들 무전 소리, 차 지나다니는 소리, 버스 오는 소리가 뒤섞인 와중에도, 그 말만 또렷하게 들렸다. 경석은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한 번 훑었다.


“그냥… 박스 좀 옮기고요. 서류 같은 거.”


검사의 시선이 그의 손에서, 명함에서, 다시 얼굴로 올라왔다.


눈동자가 잠깐, 아주 잠깐 멈췄다. 형사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


“추가 조회 넣어볼까요?”


검사는 대답 대신, 주민등록증 뒷면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주소,

생년월일,

발급일


. “전과는요?


“없습니다.”


검사는 짧게 숨을 내뱉었다.

입김이 희미하게 흩어졌다.


“됐습니다. 보내죠.”


형사가 약간 놀란 얼굴로 그를 봤다.


“그냥 보내요?”


“네. 오늘은 이 근처에 있었다는 것만 적어두세요.”


검사는 주민등록증과 명함을 동시에 경석에게 내밀었다.

경석이 그것들을 받아 쥐는 순간, 남자의 손가락이 잠깐 그의 장갑에 스쳤다.


“오늘 심부름은 몇 시쯤 끝날 것 같습니까.”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경석은 괜히 뒤를 한 번 돌아봤다.


자기가 나온 건물, 간판 없는 4층짜리 건물이 멀찍이 서 있었다


. “글쎄요. 끝나라고 할 때까지요.”


검사의 입가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웃는 건지, 비웃는 건지 모를 표정이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요, 오늘은… 서로한테 좀 일찍 끝났으면 좋겠네요.”‘서로한테.’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경석은 이해하지 못했다.

굳이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가보셔도 됩니다.”


형사가 폴리스라인 한쪽을 들어 올렸다.

경석은 짧게 고개를 숙이고 걸음을 옮겼다. 버스 정류장까지 몇 걸음 되지도 않는 거리였다.

그 몇 걸음을 옮기는 동안, 방금 전 대화가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재생됐다.


심부름.

박스.

오늘.


버스가 도착해 서는 소리에, 그는 생각을 잘랐다.

문이 열리자마자 올라탔다. 창가 자리에 앉아 유리창 밖을 보았다.

검사는 다시 검은 세단 옆으로 돌아가 서류를 넘겨보고 있었다.


멀어서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한 번 이쪽을 쳐다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미친… 괜히 찝찝하게 말하네.’


경석은 코트를 여미며 창문에서 고개를 돌렸다.


버스가 출발했다. 뒤로 밀려나는 골목과, 점점 작아지는 폴리스라인, 겨울 공기 속에 서 있던 정장들.


그 모든 것이 멀어지는데도, 그 한 마디만은 이상하게 가까이 붙어 있었다. 오늘은 좀 일찍 끝났으면 좋겠네요. 서로한테.

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