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03. 12.
고목에 꽃이 핀다. 오래 묵은 나무에 새순이 돋고 꽃이 피었다고 사람들은 회춘했다 하지만, 고목은 그저 제 삶을 살아갈 뿐 결코 호들갑 떨지 않는다. 껍질이 벗겨지고 속살이 썩어 움푹 폐인 나무에 썩은 가지가 더 많지만, 살아있는 몇 안 되는 가지에 푸른 잎이 생기고 꽃이 피니 그 반가움이야 말해 뭣하겠는가? 꽃이 그리운 겨울이 지나 이른 봄에 산 자의 영혼을 맞이하듯 기쁨을 주는 티 없이 맑은 꽃망울에 눈물을 글썽인다. 일상에서 우리는 늘 어려움에 처하고, 또 고난을 극복해 가는 과정을 경험한 흔적을 확인하고 동정과 연민을 보내며 위로한다. 고목에 핀 꽃을 보면서 다가가 살피는 것도 삶의 과정에서 오는 동병상련의 느낌이 있어 더 찡한 마음을 갖는 것이다.
일상은 변함이 없다. 그저 물 흐르듯 시간이 흘러갈 뿐이다. 얼마 전, 부산 송정 바닷가에 다녀왔다. 은빛 고운 모래가 깔려있는 백사장을 옆에 끼고 걸었다. 바람이 불어 찬기운이 돌아도 고운 모래 만지며 무념무상으로 놀고 있는 아이를 보며 그저 마냥 웃고 있는 젊은 엄마를 본다. 나도 따라 실없이 웃는다. 수많은 모래알을 쥐었다 놓았다 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억겁의 시간이 흘러가고 찰나의 순간에 이곳을 스쳐가는 나의 삶을 생각한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모래알의 빛도 순간이고, 우리네 삶도 순간일 뿐인데, 우리는 왜 일상에서 이렇게 지지고 볶고, 또 애걸복걸하는가? 헤아릴 수 없는 모래알이 이 사람 저 사람 발에 밟히고, 또 한 움큼 쥐었다 놓았다 하는 대상이 되고 바람에 날리기도 하고 햇살에 반짝이는 그 모습 하나하나에서 우리네 일상의 울고 웃는 삶을 본다.
젊은 날의 바닷가는 모험의 장소가 되고 놀이의 장소가 된다. 서핑도 즐기고, 모래알을 헤며 두꺼비집도 짓고 해 너머 가는 줄 모른다. 그저 즐겁고 행복한 순간뿐이다. 나이가 들면, 바다에서 몸으로 즐기는 체험이 달갑지 않다. 그저 바라보는 바다가 좋다. 백사장 따라 걸으며 파도치는 푸른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이 즐겁다. 밀려오는 파도에 파도가 부딪치며 수없이 많은 물보라를 만들며 부서지는 하얀 포말이 어제도 오늘도 반복되는 일상의 바다라고 알려 주는 듯하다.
뿌리 깊은 나무는 세월의 흔적을 담고 산다. 볼 것, 못 볼 것 다 보면서 산전수전 다 경험한 흔적을 나이테 바깥에 새기고 가지가 말라비틀어지면 비트러 지는 대로 옹이를 만들고 누가 와서 도끼로 찍으면 찍는 대로 도끼 자국을 남기며 그렇게 세월을 묻고 살아왔기에 삶의 먼 여정 속에 그늘을 만들어 시원함을 베풀기도 했다. 고목이 될 때까지 수많은 세월을 살면서 때로는 외롭기도 하고, 또 때로는 사람들이 들려주는 일상의 아기자기한 이야기를 들으며 전설도 만들고, 역사도 만들며 삶의 이야기를 후대로 전하고 또 전하면서 살아왔기에 심심하지 않았다. 혼자였으면 긴긴 세월 동안 참 지루했을 텐데 바람 친구, 구름 친구, 사람 친구 등등 만나면서 재미나는 이야기를 만들었어 고목이 되도록 참 잘 살아왔다. 이제 다시 피우고 피워왔던 꽃을 피우니, 새 생명을 얻은 듯 모두 함께 축하를 나눈다.
일상에서 삶을 살아가는 우리도 고목과 다르지 않다. 늘 마음속으로 젊었던 시절을 회상하며 회춘을 꿈꾼다.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지나야 그제사 과거를 돌아보며 삶의 나이테를 세고 응어리진 옹이를 만지며 상처를 위로한다. 이만큼 살았으니, 잘 살았노라 하고 자위하다 보면 위안이 위로가 되어 긍정에너지가 솟고 즐거움이 따르게 된다. 나이 들어 행복하다면 그것이 고목에 꽃이 핀 것과 다르지 않다. 삶에 볕이 들었으니, 다시 청춘으로 향하는 마음이 생기고 회춘하는 격으로 느껴져 즐거운 것이다.
젊음은 그 자체가 아름답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느끼지 못하고 고뇌에 찬 눈빛으로 산다. 매일이 전쟁이고 매일이 힘들다고 아우성치며 바쁘게 일하고 사랑하고 즐기며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산다. 다 그렇게 살고 있다고 착각하면서 나만 힘들다고 호소하며 짜증내기도 한다. 하지만 추억을 먹고사는 나이가 되고 보면, 청춘이 얼마나 그리운지 말할 수 없다. 과거를, 젊은 시절을 돌아보는 회상으로도 즐거움이 가득하다. 기력이 떨어져 병상에 눕기 전에 젊음을 회상하고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있다면 그것으로 회춘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마음에서 나이야 가라 하면서 푸른 싹이 돋고 꽃이 핀다. 꽃이 필 것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어느새 갑자기 솟은 꽃대에 꽃이 피는 상사화처럼 고사목 같은 고목에 꽃이 핀다. 나이테가 늘어 갈 즈음에 비로소 젊음을 돌아보듯이 고목에 꽃이 피어야 비로소 우리는 삶이 아름답다고 알게 된다. 그제사 우리는 생을 참 잘 살았노라고 홀로 읊조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