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관으로 빨리 임신할 줄 알았는데, 시험관 고차수가 되었다.
나는 결국 시험관 12차를 시도하는,
'고차수'가 되었다.
설마, 내가 고차수가 되겠어? 그 전에 끝나겠지.
라는 가벼운 의심이 무색하게 현실이 되었다.
시험관을 처음 시작할 때,
4차 안에는 되지 않겠어?
시험관 4차 실패의 고배를 마시고 나서,
10차 안에는 되지 않겠어?
시간이 갈수록 텅 빈 곳간이 될 나의 난소를,
그 곳간에 남아있는 소중한 난자들을
단 한 개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1년이 흘렀다.
시험관 12차를 할 동안 한 달도 쉬지 않았다.
9번의 채취와 3번의 이식.
극난저라 한 번에 채취되는 난자는 늘 한 손에 꼽혔다.
드래곤볼 모으듯 하나하나 모아
'아가야 꼭 만나자'라는 염원 하나로
이식한 배아는 3차 이식동안 7개.
그 결과는 좋다가도 말았다.
동결이식 1차, 임신 6주 계류유산
동결이식 2차, 비임신
동결이식 3차, 화학적 유산
아기와 만나기 직전 관문에서 나를 놀리는 양
줬다 뺏는 것 같은 느낌을 늘 지울 수 없었다.
그럴 때면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탓하다가,
결국 나에 대한 자책으로 마무리 지었다.
고차수가 되니,
차수 종료의 두려움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정부에서 지원해주는 출산당 시험관 20번 제한,
이제 반도 남지 않았는데..
20회가 되도록 임신을 못하면 어떡하지?
아기와 만날 때까지 시험관을 끝낼 생각이 없었는데,
20차를 끝내고 난 후,
원치않게 시험관을 끝내야 한다는 사실.
정말 원하면 지원금 없이 자비로 하고 싶지만,
차수당 500만원을 훌쩍 넘는 시험관 비용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사실상 비자발적 포기.
자연임신 하면 되잖아? 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자연임신이 어려운 난소 상태일 뿐만 아니라
'자연임신이 될까' 라는 막연한 가능성의 길에서
또 한 번 헤매며 어둠 속을 걷고 있을 나를 생각하니 그러고 싶진 않았다.
얼마 전 일이었다.
충청남도 시험관 차수 지원이 무제한으로 바뀌었다는 뉴스를 봤다.
시험관을 함께 하는 단톡방에서 이 소식이 뜨거웠고,
희망적인 소식이라고 생각했다.
지자체 한 곳에서 시작하면,
다른 지자체에서도 검토는 해볼테니까.
하지만,
고차수이면서 나이가 있는 시험관 동지 언니들은 싱숭생숭하다고 한다.
무제한이 되면 좋긴 하지만,
계속 임신이 되지 않을 경우
제도가 끝을 내주는 것이 아닌
내가 스스로 끝을 내야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싱숭생숭하다고 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마음이라
머리를 탁- 치고 지나가는 순간이었다.
끝이 있다는 건 두렵지만,
끝이 없다는 건 더 큰 책임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마음을 헤아리기에는 나는 한참 어린 마음이었다.
3번의 이식동안 결국 아기와 만나지 못하고 여전히 홀몸이다.
1년간 정들었던 난임병원을 뒤로 하고, 새로운 병원으로 전원했다.
'전원하면 마음도 리프레쉬 되고 좋아' 라는 전원 경험자들의 말을 실감했다.
리프레쉬 되는 마음의 영향이었을까,
새롭게 결심한 것도 있다.
매달 무리해서 시술을 하지 않으리라.
괜찮다는 말로 내 몸을 몰아붙이지 않으리라.
지나고 보니,
'나 괜찮아' 라는 말이 사실은 괜찮지 않은데
관성으로 말했던 적이 더 많았다는 걸
매달, 그리고 빨리빨리 하면
아기도 빨리빨리 갖게 될 줄 알았다.
그 신념 하나로 '나는 괜찮아' 라며
쉼 없이 매달 달려왔다.
그렇게 달려왔어도 결론은 임신이 아니었다.
12차가 되어서야
조급한 마음에 제동을 걸고,
생활의 중심에 '시험관', '임신'만을 두지 않기로 했다.
나의 조급함이 낳은 노력들이
임신을 앞당기지 못했다면 조급할 필요가 있는가?
늦어지면 뭐 어때.
12차가 되어서야 마음의 평안을 찾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