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너하임 에인절스
'진짜 나를 보러 왔다고?'
그 생각 하나에 심장이 요동쳤다. 마운드에 올라가 나는 한 구, 한 구 전력으로 던졌다. 스카우트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스피드건을 들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은 읽을 수 없었지만, 지난번보다 훨씬 더 진지해 보이는 건 분명했다.
경기가 끝난 뒤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걸어가니, 스카우트가 말했다.
"첫 스피드건은 88마일(약 142km) 정도 나왔어."
두산 시절 최고 구속이 144km였는데 지금 142km라니. 조금 아쉬웠다.
그는 이어서 뜻밖의 말을 건넸다.
"볼은 빠르진 않지만, 네 공이 되게 지저분하더군."
그리고는 갑자기 물었다.
"다음주에 애너하임 메이저 구장으로 올 수 있어?"
티비로만 보던 오만석 규모의 메이저리그 구장에, 그것도 테스트를 위해 나를 초대하겠다고?!!!!
예상조차 못했던 첫번째 기회가 내 앞에 찾아온 것이다.
다음주가 되자, 온몸이 굳을 만큼 초 긴장한 상태로 드디어 에인절스 구장에 도착했다. 스카우트가 마중 나와 있었고, 나는 티비에서만 보던 이중 불펜 구조의 왼편 관중석 쪽에서 테스트를 받게 됐다. 맨날 멕시코인들과 허름한 곳에서 던지던 내가, 메이저리그 불펜에서 공을 던지고 있다니. 그날 테스트를 본 다른 선수들은 백인 고등학생 네 명 정도였다. 그들과 함께 테스트를 보게 된 것이다.
조금 뒤, 스카우트 최종 결정권자로 보이는 인물이 투벅투벅 걸어왔다. 걸음걸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 저 사람이 스카우트 대빵이구나.'
그는 내 투구를 몇 개 지켜본 뒤 이렇게 말했다.
"나이스볼~"
그리고 한 마디 더.
"볼이 아시안 같지가 않아. 네 실전 투구를 직접 보고 싶군."
그는 1주일 뒤 직접 사회인 야구장으로 가겠다며, 그 자리에서 최종 결정을 내리겠다고 했다. 그렇게 약속을 받고 한인타운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파티가 열렸다. 엘에이 코리아타운에서 친해진 형님들이 모여 축하해줬다.
"병목아, 두 달 만에 메이저리거 되는 거 아니냐!" 다들 들떠 있었다. 솔직히 나도 자신 있었다. 그날까지 상대했던 팀들은 아마추어 애들이었고, 거기서 공을 서너 번 던지면 내 공을 건드리는 애가 단 한 명도 없었다.
'나는 이미 뽑혔다.'
파티에 있던 형님들도 말했다.
"너는 이제 애너하임 에인절스 선수다."
"니 볼을 칠 사람이 없다."
"원래 던지던 대로만 해. 넌 에인절스 선수야"
그리고 D-DAY! 마침내 그날이 왔다.
극도의 긴장 속에서 사회인 야구 구장에 도착했고, 최종 스카우트 담당자 앞에서 투구를 시작했다.
하지만, 예상과 정반대의 일이 벌어졌다.
그야말로 개 난타 당했다...
아웃카운트 하나 못 잡고 5실점. 던지는 족족 2루타.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웠다. 긴장이었는지, 운이 나빴던 건지. 배불뚝이 50대 아저씨에게도 2루타를 얻어맞는 순간에는 정말 정신이 멍해졌다. 스카우트는 아무 말 없이 스피드건을 가방에 넣고 유유히 떠났다. 마운드 위에서 그 모습을 보는데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시X… 끝났다.'
그렇게 실망한 마음을 이끌고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왜 하필 오늘 개박살이 났을까. '그래, 스카우트가 애너하임만 있는 건 아니잖아. 애틀랜타에서도 오고, 필라델피아에서도 오니까... 다시 준비하면 되지.'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다음날,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까를로스였다.
"앞으로 나올 필요 없어."
나는 사회인 야구 팀에서도 방출된 것이다. 두산에서 방출된 지 7개월 만에 또 다시 방출. 그것도 사회인 야구 팀에서. 외국인인 내가 필요했던 이유는 하나였다. 날 넘기고 수수료라도 받아먹으려고 했던 건데, 이젠 필요가 없어진 거니 꺼지라고 한 게 아닐까. 나를 받아줬던 이유가 바로 그거 였다. 내가 프로 선수 출신이니깐 혹시 나를 스카우트들에게 보여주고 몇 푼이라도 챙기려고 했던 것이다. 다른 애들은 순수 사회인 야구 동호인들이고, 나는 전략적으로 그 팀에 들어갔던 거고. 난 그걸 몰랐던 것이다. 호텔 프런트 형님이 '프로 선수 출신이고 90마일 나온다' 고 소개했으니, 메이저리그 스카우트 앞에서 나를 보여줄까 했던 것이다.
모두에게 쓸모없는 사람이 돼버렸다. 더 이상 민폐를 끼칠 수 없었다. 나는 곧바로 호텔 형님 집을 나왔다. 그리고 다시 노숙을 시작했다. 내 자신에게 실망했던 나는 그 집에 있을 수가 없던 것이다.
'내 도전은 이대로 끝나는 걸까.' 길거리에 누워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뜻밖의 한 사람과 마주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