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고등학교 시절
나는 팀에서 ‘겉절이’였다.
중심을 이루는 ‘진짜 배추’ 선수들은 따로 있었고, 나는 그저 그들을 채우기 위해 딸려온 존재에 불과했다.
어떠한 기대와 관심도 받지 못했다. 말 그대로 투명인간이었다.
성남고등학교 1학년 당시 내 최고 구속은 105km. 같은 학년 친구들은 이미 125km 정도를 던지고 있었다.
그러니 감독님이나 코치님이 나에게 눈길을 줄 이유는 단 하나도 없었다.
수비를 하든 런닝을 하든, 연습장에 나와 있는 나에게 말을 걸어주던 지도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렇게 1년을 벙어리로 지냈다.
아무도 내게 야구를 가르쳐주지 않았다. 모든 건 내가 직접 찾아야 했다.
그때 TV에서 흑인 육상선수 한 명을 보게되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도노반 베일리.
고등학교 1학년이던 나는 그가 100미터 달리기 하는 모습을 보고 반해버렸다. 그 눈앞의 장면은 내게 야생마 같았다. 나는 100미터가 20초 정도 나왔으니, '저렇게 빨라지면... 혹시 나도 공이 빨라질까?' 그 막연한 생각이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아버지가 예전에 '발이 빨라지면 공도 빨라진다'고 했던 말도 떠올랐다.
그때부터 나는 뛰기 시작했다.
포레스트 검프처럼 이유 없이, 계속 뛰었다.
하루 10시간 훈련을 마치고 밤 9시에 야간 훈련이 끝나면, 다른 선수들은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나는 11시까지 2시간을 더 뛰었다. 버스 막차를 타고 집에 가면서 스스로와 약속했다.
'이 런닝을 하루도 빠지지 말자. 입안에 가시가 돋아도 무조건 뛰자.'
그 약속을 지켰다. 1년 뒤, 내 구속은 130km가 됐다.
그제서야 투명인간 취급하던 주변 사람들이 조금씩 달라졌다. 감독님이 말을 걸었고, 라면과 믹스커피만 시키던 코치님도 나를 불렀다. 그 당시 내 별명은 '미스 유'. 감독님 라면 담당, 코치님 냉커피 담당이었다.
그런 신세였던 내가 관심을 조금씩 받기 시작한 것이다.
고3이 되자 구속이 137km까지 올랐다. 인생이 바뀌는 듯 했다.
그동안 받지 못했던 관심을 한 번에 받았다.
그러나 그 순간 갑자기 부상이 찾아왔다. 런닝을 뛰다가 연습장 바닥에 굴러다니던 레쓰비 캔을 밟았다. 발목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 해 나는 3경기밖에 못 뛰었다. 성적도 3이닝 10실점?으로 기억한다. 프로 지명은 당연히 물 건너갔다.
대학도 그랬다. 마지막 대회인 황금사자기까지 모두 끝났지만, 어느 곳에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당시 제주도 신생 팀인 제주관광대와 탐라대가 있었다. 그나마 실력이 부족한 애들은 거기라도 갈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곳조차 나를 뽑지 않았다. 나는 어디에서도 야구를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야구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한 나는, 결국 부산으로 도망가기로 했다. 부모님을 볼 자신도 없었다.
짐을 싸는 중에 신발장에서 스포츠 신문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앞면이 모두 프로야구 얘기였다. 드래프트 소식이 맨 앞에 실려있었다. 그건 완전히 남의 얘기지. 신발장에 있는 신문을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래, 다 포기하고 엄마, 아빠 오기 전에 부산으로 도망가자.'
짐을 들고 집을 나섰다. 신문도 함께 들고 나왔다. 강남 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해서 부산행 버스표를 끊었다.
버스를 기다리며 갑자기 너무 심심하잖아. 드래프트는 누가 뽑혔을까. 잠시 지루함을 달래려 방금 가져온 신문을 보기 시작했다.
‘OB엔 역시 1순위로 송원국이가 뽑히고, 2순위로 이혜천... 다른 팀(LG)에는 서승화도 보이네... 아 그래, 부럽다’
'얘네들은 프로 지명 받고 돈 많이 받겠는데 나는 뭐하고 있나. 부산으로 도망이나 가고.'
앞면을 다 보고 뒷면으로 넘기던 순간이었다.
OB =
…
…
⑩유병목(투수·성남고)
내 이름이 있는 것이다.
뭐지!? 기사가 잘못된건가? 오보인가? 여기 내 이름이 왜 있지?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이건 말이 안되잖아?
스카우트를 본 적도 없고, 감독님도 내 얘기를 한 적이 없었는데, 내 이름이 있었다.
확인할 방법이 없어서 부랴부랴 학교로 전화를 걸었다. 하필 감독님이 받으셨다.
“감독님, 저 유병목인데요. 어떻게 된거죠? 혹시... 뽑힌 건가요?”
“그래, 병목아. 맞다. 집 전화가 안 돼서 연락을 못했다. 뽑힌 거 맞다.”
그 말 한마디에 부산행 표를 취소했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집에 돌아와 몰래 짐을 풀었다.
그리고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나... 오비베어스 지명 받았어."
엄마도 기뻐했고, 아버지도 문 틈 사이로 눈물을 보이고 계셨다.
아마 안될 줄 알고 계셨을 것이다. 프로는 고사하고 대학교에서도 오라는 곳이 없었으니깐, 당연히 모두가 포기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렇게 나는 (OB→)두산베어스에서의 프로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도대체 왜 나를 뽑았을까?'싶은데,
그 이유를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