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동화] 귀담이와 어치, 염려?

(1화) 응, 여기까지 잘 왔어

by 성낙필

비가 오지 않는데도 귀담이의 세상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수달인 귀담이는 물가 낮은 굴집 입구에서

발만 동동 굴렀다.


천적이 나타난 것도, 강물이 불어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잘못될 것 같다'는 신호가

구급차 사이렌 소리처럼 터져 나왔다.


그 와중에도 머릿속엔

어젯밤 엄마와의 다툼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59년을 살아온 귀담을

아직도 아이 취급을 하며

명령을 내리시는 엄마, 안담 여사.


그 앞에서 참지 못하고 내지른 소리는

귀담이의 발밑에 놓인 지뢰가 되어버렸다.



"또 시작이네…. 숨이 잘 안 쉬어져.“



숨은 턱 끝에 걸려 잘게 부서졌고,

발바닥은 뜨겁게 달궈진 돌 위를 걷는 듯

화끈거렸다.


귀담이는 이 불길한 예감을 피하려

무작정 숲으로 달렸다.


'마음 치유의 숲'이라 적힌 낡은 표지판을 지나

칡 덩굴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때였다.


"야, 수달! 너 거기서 뭐 해?

내 도토리 밟을 뻔했잖아!"


머리 위에서 까칠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렌지빛 몸에 파란 깃털이 섞인 날개를 파닥거리며

어치 한 마리가 내려앉았다.


녀석은 부리에 커다란 도토리 하나를 물고

바닥에 구멍을 파느라 분주했다.


"미안…. 숨이 자꾸 끊어져서…. 잠시만 좀 쉴게."

"숨? 숨이야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거지,


그걸 왜 네가 붙잡고 있어?

나처럼 바쁘게 움직여 봐.


난 지금, 이 가을이 다 가기 전에

숲 곳곳에 수천 개의 도토리를 숨겨야 한다고."


귀담이는 어치가 흙을 파고 도토리를

꾹꾹 눌러 담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치야, 넌 그 수천 개를 어디다 묻었는지

다 기억해?

하나라도 잃어버리면 어떡해?

겨울에 배고프면 큰일이잖아."



어치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답했다.


"기억? 그걸 어떻게 다 하냐?


사실 절반도 기억 못 해. 아마 한 30%나 찾으려나?"



귀담이는 깜짝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뭐? 그럼, 나머지는 다 버리는 거야?

아깝지도 않아?”

“만약 도토리가 모자라서

네가 굶어 죽으면 어쩌려고 그래!

난 그런 상황이 올까 봐 무서워서 잠도 못 자는데…."



어치는 부리에 묻은 흙을 털어내며 땍땍거렸다.





"야, 수달아. 넌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겨울 굶주림'을 지금 당겨서 걱정하고 있구나?”




“내가 못 찾은 도토리는 땅속에서

싹이 터서 나중에 큰 나무가 될 거야.”


“그럼 내 자식, 손자들이 그 나무에서

또 도토리를 먹겠지.”


“난 지금 '잃어버릴 걱정'을 하는 게 아니라,

숲에 '나무를 심는 재미'를 느끼는 중이라고."



귀담이는 가슴이 뜨끔했다.


귀담이의 공황은 늘 '통제할 수 없는

미래'에서 시작됐다.

완벽하게 준비하지 못하면 버림받을까 봐,


내가 모든 걸 기억하고 관리하지 않으면

세상이 무너질까 봐

스스로를 옥죄어 온 24년이었다.



"어치야, 넌 억울하지 않아?

네가 고생해서 모은 걸 남(숲)이 가져가는데도?"



"억울하긴! 숲이 풍성해지면

내가 쉴 그늘이 넓어지는 건데.”



“수달아, 넌 너무 '내 것'을 완벽하게 지키려다
숨이 막히는 거 아닐까?”



“가끔은 네 걱정도, 네 완벽함도

이 숲에 그냥 툭 던져놔 봐.”


“잃어버려도 괜찮아.

그 빈자리에서 다른 게 자랄 테니까."


어치가 파란 날개를 펴고 숲 저편으로 사라지자,

숲의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던

하늘나무의 잎사귀들이 파르르 떨리며

낮은 울림을 보냈다.


하늘나무는 귀담이와 어치의 대화를

모두 듣고 있다가 뽀송한 털이 자욱한 잎으로

귀담이를 감싸 안으며 이렇게 말했다.





하늘나무의 잎새 바람


"귀담아, 너의 걱정 중 대부분은 결코 현실이 되지 않아.“


”어치가 까먹은 도토리가 울창한 숲을 만들 듯,
네가 놓쳐버린 완벽함의 빈자리에는
'여유'라는 이름의 새로운 종이 자라날 거야.“



오늘은 도토리 하나쯤은 잃어버려도 괜찮은 날이야.



”그렇지, 여기까지 잘 왔어.“




귀담이는 아주 천천히,

태어나서 처음 하는 것처럼 깊은숨을 내뱉었다.


어치가 파놓은 작은 구멍 위로

어스름의 햇살이 내려앉고 있었다.


”귀담아, 그래도

여기까지 잘 왔어.


조금 잊어버려도, 조금 부족해도 괜찮아.“


얼굴색이 편해진 귀담은

내일 만날 치유 숲의 다른 친구들을 꿈꾸며


하늘나무의 한마디를 이불로 덮고

오늘의 궁금증을 자장가 삼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나지막한 참나무 숲에서 주로 서식하는 어치는
무척이나 경계심이 강한 친구입니다.
저와 같은 침입자(?)가 나타나면 마치 숲이라는 성의
수문장처럼 쫓아다니며 큰 소리로 나팔을 붑니다.

그만큼 자기 세계의 소중함을 아는 종이겠죠.
하지만 힘들 겁니다.
그럼에도 이 녀석들의 부족한 기억력이
결국 그 숲의 생명들을

영속하게 하니 어찌 고맙지 않겠습니까….


다음 2화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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