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동화] 칠면초와 귀담, 타인의 시선

(2화) 응, 여기까지 잘 왔어

by 성낙필

귀담이는 어젯밤 악몽을 꾸었다.


꿈에서 엄마인 안담 여사께서 울고 계셨다.

귀담은 그 이유가 모두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며

무거운 아침 눈을 비비고 일어났다.


여전히 어지럽고 숨쉬기가 불편한

아침이었지만,

치유의 숲에 있다는 복식호흡을

아침 식사 삼아서


어치의 숲을 지나

갯벌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올라섰다.



귀담이의 눈앞에는 타오르는 불길 같은

붉은 물결이 펼쳐져 있었다.


칠면초 무리였다.


"와…. 멋있다."




누군가는 감탄을 내뱉을 풍경이었지만,

59세 수달 귀담이의 가슴은

다시금 묵직한 돌덩이를 얹은 듯 가라앉았다.


얼마 전, 동료가 툭 던진 한마디가

갯벌의 짠물처럼 가슴으로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귀담씨는 늘 여유가 넘쳐서 좋아.

오늘 물고기 한 마리도 못 잡았는데

허허 웃기만 하잖아.”


그 말은 칭찬이 아니라

추운 겨울 물가를 뒤덮은 예리한 얼음조각 같았다.





24년 전 공황이 찾아온 이후,


귀담이는 단 한 번도 다른 수달들 앞에서

'안 괜찮은' 척을 해본 적이 없었다.


밤새 물고기를 잡아야만 할 때도,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도

그는 늘 '괜찮은 척' 붉게 웃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이 갯벌 같은 세상에서

밀려나지 않을 것 같았다.


"너희도…. 짠물 속에서 웃느라 고생이 많구나."


귀담이가 혼잣말을 내뱉자,

발밑에 엎드려 있던 칠면초 하나가

가늘게 몸을 떨며 말을 걸어왔다.


"수달 아저씨, 우리가 예뻐 보여요?“


”이건 웃는 게 아니라, 몸 안의 소금기를

밖으로 밀어내느라

온 힘을 다하고 있는 거예요."


귀담이는 깜짝 놀라 허리를 숙였다.


"소금기를 밀어낸다고?"


"우린 짠물이 좋아서 여기 있는 게 아니에요.

갈 곳이 없어서, 밀려나다 보니

이 척박한 갯벌까지 온 거죠.“


”하루에도 두 번씩 덮쳐오는 저 독한 짠물을

견디지 못하면 우린 말라 죽거든요.“


”그래서 저 붉은색은

우리에겐 비명이나 다름없어요.“


”나 지금 살고 싶어!'라고 외치는

눈물 같은 거라고요."




귀담이는 멍하니 자신의 손을 보았다.


남들에게 '성실한 수달', ‘믿음직한 가장’

'효자 수달'로 보이기 위해

그가 억지로 짜냈던 미소들이

칠면초의 붉은 잎사귀와 겹쳐 보였다.


타인의 시선이라는 짠물이 덮칠 때마다

속을 태우며 버텨온 세월.


자식은 부모에게 힘든 얘기를 하면 안 된다는

안담 여사에게

늘~, 괜찮은 척 웃어온 세월.


그건 칭찬받을 여유가 아니라,

존재를 지키기 위한 처절한 방어였다.



"나도 그랬어.

늘 괜찮은 척해야만

버림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나 봐.”


“아니, 내가 괜찮지 않으면 내 가정이, 직장이

부모님이 힘들어할까봐 그랬을까?”


“암튼, 돌이켜보니 짠물에 절여지면서도

소금기 하나 없는 맑은 물인 척하느라

내 마음은 이미 너덜너덜해졌어."


칠면초가 파도 소리를 섞어 속삭였다.


"아저씨, 그냥 붉어지세요.

억지로 초록색인 척하지 마세요.”


“붉게 변했다는 건 아저씨가 그만큼

독한 짠물을 잘 버텨냈다는 증거니까요.”


“그 색깔 그대로가 충분히 귀해요."


귀담이의 눈가에 맑은 이슬이 맺힐 때

옆에 있던 하늘나무가 갯벌 위로

무성한 잎을 드리우며 속삭였다.





하늘나무의 잎새 바람


"귀담아, 네가 두려워하는 '타인의 시선' 중

대부분은 타인의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만든

'완벽해야 한다는 환상'의 투영 아닐까?”



“칠면초가 붉게 변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듯,
너의 아픔과 피로를 굳이 숨기지 마.”



“붉은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생명만이

다시 초록의 봄을 맞이할 자격이 있잖아."



귀담이는 갯벌의 비릿한 바람을

깊게 들이마셨다.


여전히 세상은 짰지만,

칠면초의 붉은 빛이

이제는 눈물이 아닌 훈장처럼 보였다.



"응, 여기까지 잘 왔어.
이제 조금은 안 괜찮아도 괜찮아.“




다시 숲으로 돌아온 귀담은

조금은 안정된 가슴을 쓸어내리며

내일 만날 숲의 친구들을 베개 삼아

하늘나무의 튼실한 뿌리 위에 편하게 누웠다.




칠면초는 서해안이나 남해안의 갯벌에서
볼 수 있습니다.
가을이 되면 토양 염분 농도가 더 올라가고
기온이 내려가면서 생리적 스트레스가 커져.
그때 잎 속에서 안토시아닌(anthocyanin)이라는
색소가 많이 만들어지는데,

이 색소가 바로 붉은색을 띠게 하는 주범입니다.

이렇게 붉어지는 이유는
결국 강한 햇빛으로부터 세포를 보호하고,
염분과 저온 스트레스를 완충하기 위한
생존전략입니다.

염습지를 서식지로 택한 칠면초가 살기 위해
진화로 선택한, 아주 오래 쓴 일기장과 같습니다.


다음 3화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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