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응, 여기까지 잘 왔어
어제 바닷가에서 찬 바람을 맞아서 그런지
감기 기운을 느끼며 일어난 귀담은
커다란 하늘나무 잎에 맺힌 아침이슬을 모아
따뜻한 이슬차를 만들어 마셨다.
초록이 물든 찻잔에는
어제 비둘기가 내 이야기를 엄마에게
잘 전달했는지,
엄마가 나에 대한 서운함에서 벗어나셨는지
걱정이 짙게 녹아 있었다.
하늘나무는 귀담이 등을 토닥이며
논이 이어진 습지로 걸어갔다.
새벽의 여명이 비치는
한가한 논둑을 걷고 있을 때,
갑자기 날개가 부러진 듯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는 어미 오리가 보였다.
깜짝 놀라 그곳을 바라보니
엄마 오리를 따라가는 새끼들과
잔뜩 몸을 낮추고 그 뒤를 쫓는
삵 한 마리가 보였다.
어미 오리가 비명을 지르며
날개를 차가운 논바닥에 후려치자,
삵의 매서운 눈은
어미 오리에게로 쏠렸고 자연스레 방향을 바꿨다.
새끼들은 어느새
갈대 사이로 흩어져 시야에서 사라졌다.
귀담이는 어미 오리를 도와야 한다는 사명을 띠고
가장 성난 얼굴을 하며 삵에게 달려갔고
삵은 자신보다 덩치가 큰 귀담을 보자
개울 쪽으로 급하게 도망쳤다.
어미 오리가 힘겹게 날개를 끌며
귀담이 쪽으로 다가왔다.
숨은 거칠었지만, 눈빛은 단단했다.
“고맙습니다. 수달 아저씨.”
귀담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몸은 괜찮아요?
“실제로 아프건 아니에요.” 어미 오리가 말했다.
“아픈 척한 거예요.”
귀담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다가 삵에게 표적이 될 수 있잖아요?”
오리는 잠시 침묵했다.
“새끼들은 삵에게서 달아날 힘이 없잖아요.”
“그래서 나를 잡아가라고 연기를 한 거예요.”
“새끼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렇게 연기할 때가
많아요. 하지만 그때마다 심장은 늘 떨리죠.”
“삵이 속아 넘어갈지, 새끼들이 무사히 숨었는지,
혹시 내가 너무 과하게 연기해서 의심받지는 않는지…”
귀담이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도… 그래요. “가족을 지키려고,
내가 속한 자리를 지키려고, 괜찮은 척 많이 했어요.”
“힘들어도 괜찮다 하고,
무너질 것 같아도 괜찮다 하고."
"사실 요즘 내 고통을 모르는 엄마가
조금 서운한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어미 오리가 고개를 들었다.
“그럼, 수달 아저씨는
언제 괜찮지 않다고 말하나요?”
귀담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논 위로 바람이 스쳤다.
“연기는 오래 못 가잖아요.”
어미 오리가 말했다.
“우리를 해하려는 것은 속일 수 있어도
내 심장은 못 속이거든요.”
“연기가 길어질수록 진짜 내가 어디 있는지
헷갈릴 때도 있어요.”
귀담이는 깊은 공감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도…. 아들로, 가장으로, 직장의 일원으로
너무 오래 날개를 질질 끌고 살았어요.”
“부러지지도 않았는데 부러진 척하면서.”
“그러다 보니 현실의 ‘나’는 어디로 갔는지
모를 때가 많았어요.”
어미 오리는 귀담에게 눈물을 닦도록
부드러운 깃털을 하나 물어 주었다.
“새끼를 지키는 건 내 역할이에요.”
“하지만 내가 살아야 그 아이들도 살 수 있어요.”
“연기는 짧게, 숨은 길게, 그게 맞는 것 같아요.”
“현실에 닥치면 마음처럼 잘 안되긴 하지만···.”
그때 하늘나무가 부드럽게 가지를 흔들었다.
“귀담아, 강한 척하는 것과 강한 것은 달라.”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너를 태우는 삶은
오래가지 못해.”
“날개는 연기하려고 있는 게 아니라
날려고 있는 거잖아.”
논 위에 해가 조금 기울었다.
어미 오리는
갈대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연기를 멈춘 자리에는 조용한 숨만 남았다.
귀담이는 낮게 속삭였다.
“나…. 이제는 조금 괜찮지 않다고
말해도 될까?”
갈대 사이에서
아주 작은 삐약 소리가 들려왔다.
하늘나무는 대답 대신 귀담이의 숨이 고를 때까지
그늘을 옮기지 않았다.
“그래···, 여기까지 잘 왔어.”
귀담이는 오늘은 엄마 생각에 잠을 설치지 않고
피곤한 몸을 누일 수 있었다.
내일 만날 공황 숲의 친구를 그리며.
실제로 현장에서 엄마 오리가 다친 척하는
의상행동(擬傷行動, injury-feigning behavior)을 보면
정말 눈물이 납니다.
사실 이건 단순한 모성애 감정이 아니라
진화적으로 선택된 생존 전략이긴 하고
위험이 사라지면 멈추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런 연기를 ‘평생 모드’로 가져가며
스스로를 학대하기도 합니다~ㅠㅠ
다음 6화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