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동화] 물두꺼비 마음 상담소, '내면아이'

(7화) 응, 여기까지 잘 왔어

by 성낙필


단잠을 자고 눈을 뜬 귀담이는

하늘나무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잠시 집에 다녀와도 될까요?

엄마가 자꾸 마음에 걸려서요."


하늘나무는 말없이 가지를 흔들어

길을 터주었다.


"응, 다녀오렴. 네 마음이 향하는 곳에

답이 있을 거야."


오랜만에 돌아온 집 근처는 여전히 분주했다.


하지만 귀담이는 차마 안담 여사가 계신

안방 문을 바로 열 수 없었다.


문 너머로 들려올 "너 어디갔다 왔어?",

"나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러니?"라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벌써부터

가슴을 조여왔기 때문이다.


귀담이는 발길을 돌려 동네 어귀,

습지 옆에 자리한

낡은 연잎 지붕의

'물두꺼비 마음 상담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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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떨리는 손으로 얼마 전 숲에서 작성했던

심리검사 결과지를

물두꺼비 상담사에게 내밀었다.


커다란 안경을 쓴 물두꺼비 상담사는

결과지를 한참 동안 들여다보더니,

낮고 신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귀담 씨, 이 결과지에 나타난 당신의 마음은

마치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버린

작은 수달' 같군요."


"여기 그래프를 보세요.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의지는 하늘을 찌르는데,

정작 본인의 마음을 돌보는 지수는

바닥을 치고 있어요."


귀담이는 마른침을 삼켰다.



"선생님, 저는 제가 너무 이기적인 것 같아요."


"엄마는 저를 위해 평생을 바치셨는데,

저는 엄마 목소리만 들어도 숨이 막혀요.

이런 제가 어떻게 효자라고 할 수 있겠어요?"



이 죄책감이 저를 숨 못 쉬게 만들어요."


물두꺼비 상담사는 차잔을 내려놓으며

귀담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귀담 씨, 당신의 가슴 속에 살고 있는
'내면아이'를 만난 적이 있나요?"



"내면... 아이요?"


처음 들어보는 생경한 단어에

귀담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네. 몸은 59세의 어른 수달이지만,

마음속에는 어린 시절의 기억과 감정을

그대로 간직한 아이가 살고 있어요.“


”귀담 씨의 내면아이는 지금 아주 깊은 상처를

입은 채 구석에서 떨고 있네요.“


”이 아이는 아주 어릴 적부터

'내가 착한 아이여야만 엄마가

슬퍼하지 않는다'거나


'내가 완벽해야만 우리 가족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무거운 짐을

혼자 짊어지기로 결심했던 것 같아요."



귀담이의 머릿속에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의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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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귀담이가

울고 있는 안담 여사 곁에서 숨을 죽이며,

자신의 울음조차 삼킨 채

엄마의 눈치를 살피던 그 밤들.



엄마의 불행이 마치 자신의 잘못인 것만 같아

어린 솜방망이 같은 손으로

엄마의 눈물을 닦아주던 기억.



"공황은 벌이 아니라 신호예요.


"이제…. 자신의 이야기도 좀 들어줘."


”24년 전 공황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를

기억하시나요?"


"그때도 아마 당신은 거절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을 죽이며 '착한 아들'의

연기를 하고 있었을 겁니다."



"공황은 당신을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라,
'이제 제발 그 아이를 좀 봐달라'고
보내는 간절한 신호예요."



귀담이의 눈에서 진한 눈물이 흘렀다.


그것은 59년 동안 단 한 번도 위로받지 못했던,

가슴 속 깊이 숨겨두었던 어린 수달의 눈물이었다.


"선생님,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엄마를 외면하라는 말씀인가요?"


"아니요. '건강한 거리 두기'를 시작하세요.


엄마의 감정은 엄마의 것이고,

당신의 감정은 당신의 것입니다.“


엄마의 외로움을 당신이 대신 살아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부터가 시작입니다."


"귀담 씨는 엄마를 기쁘게 하기 위해 태어난

인형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하는

독립된 존재니까요."



상담소를 나오는 길, 귀담이는

여전히 마음이 떨렸지만

이전과는 다른 울림을 느꼈다.


그는 상담소 입구에 걸린 글귀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당신이 먼저 숨을 쉬어야,
남도 살릴 수 있습니다.'



귀담이는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자신을 괴롭히던 공황의 정체는,

사실 오랫동안 방치해온

자기 자신을 향한 미안함이었다는 것을.



숲으로 돌아온 귀담은

하늘나무에게

오늘 하루의 이야기를 천천히 늘어놓았다.


귀담이가 피곤한 눈을 비비자

하늘나무는 커다란 잎으로 이부자리를 만들면서

조용히 귀담에게 속삭였다.





하늘나무의 잎새 바람


“귀담아. “숲에는 자라지 못한 씨앗도 많단다.”

“햇빛을 늦게 만나서 비를 늦게 만나서

그저 땅속에 오래 있었을 뿐이지.”


“하지만 씨앗은 죽은 게 아니란다.”
“단지, 자랄 시간을 기다리는 거지.”



람이 천천히 귀담이를 감싸 안았다.


“우리 마음도 비슷해.”

“어릴 때 울지 못한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

울기도 한단다.”


“그건 약한 게 아니라 이제야 안전해졌다는 뜻이야.”


귀담이는 조금 놀란 얼굴로

하늘나무를 바라보았다.


하늘나무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귀담아.”

“너는 지금까지 아주 잘 버텨 왔어.”

“그래서 이제 그 아이가 너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 거란다.”



“걱정하지 마라. 이제 너는 혼자가 아니니까.”



귀담이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하늘나무 뿌리에 몸을 기대었다.


하늘나무가

조용히 마지막 말을 건넸다.


“그래…“여기까지 참 잘 왔어.”


별빛이 숲 위로 천천히 내려앉았다.

그날 밤 귀담이는 아주 오랜만에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깊은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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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두꺼비는 우리나라 산지 계곡 주변에서
발견되는 비교적 희귀한 두꺼비류
양서류입니다. 일반 두꺼비와 달리
물이 흐르는 계곡 환경에 더 의존하는 특징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습니다.


다음 8화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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