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응, 여기까지 잘 왔어
물두꺼비 상담소에서 '내면아이'라는 단어를
가슴에 품고 숲으로 돌아온 귀담이의 발걸음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숲의 입구에 들어서려 할 때는
별빛이 조용히 내려앉은 밤이었다.
귀담이는 천천히 숲길을 걸었다.
낮 동안의 생각들이 아직 마음속에서
정리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마음 치유 숲으로 들어오기 전
공동체 안에서 있었던 작은 다툼 때문이었다.
큰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서로의 말이 엇갈리면서 마음이 불편해졌고,
그 여운이 오래 남았다.
귀담이는 한숨을 쉬며 숲 안으로 들어서려 하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앞에 서 있는 큰 소나무 하나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나무줄기에는 두 종류의 덩굴이
서로 엉켜 올라가고 있었다.
하나는 칡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등나무였다.
무언가 어색한 느낌에 귀담이는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칡은 왼쪽으로 몸을 비틀며 올라가고 있었고
등나무는 오른쪽으로 감아 올라가고 있었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감고 올라가는 두 덩굴이
같은 소나무를 붙잡은 채
점점 더 단단히 얽혀 있었다.
귀담이는 중얼거렸다.
“왜 이렇게 엉켜버린 걸까…”
그때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싸우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
귀담이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칡이 천천히 잎을 흔들며 말을 걸고 있었다.
“나는 왼쪽으로 감아 올라가.”
“그리고 저 녀석은 오른쪽으로 감지.”
귀담이는 등나무를 바라보았다.
등나무도 살짝 잎을 흔들며 말했다.
“우리는 원래 같은 나무를 타지 않아.”
잠시 바람이 지나갔다.
칡이 다시 말했다.
“그런데 오늘은 같은 나무를 붙잡아 버렸어.”
“그래서 이렇게 엉켜버린 거지.”
귀담이는 한참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덩굴들은 서로를 밀어내려는 것도,
그렇다고 양보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각자의 방식대로
위로 올라가려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귀담이는 문득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동안 자신과 생각이 다른 이들을 만날 때면
마음속에서 쉽게 선을 그어 버리곤 했다.
겉으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집으로 돌아와서는
그 존재를 마음에서 조용히 지워버리기도 했다.
“왜 저럴까…”
“왜 나랑 다르게 생각할까…”
귀담이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속에서 그들을 밀어냈다.
그것이 갈등을 피하는 방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덩굴들은
그렇게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귀담이는 나무 아래에 조용히 앉았다.
그리고 가만히 덩굴들을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덩굴 아래 흙 속에서 작은 움직임이 느껴졌다.
귀담이는 몸을 숙였다.
그곳에는
작은 수달 아이 하나가 웅크리고 있었다.
어린 귀담이었다.
그 아이는 덩굴을 올려다보며
조용히 훌쩍이고 있었다.
귀담이는 천천히 그 아이 옆에 앉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말했다.
“무서웠니?”
작은 귀담은 고개를 끄덕였다.
“싸우는 걸 보면…”
“마음이 너무 불편해.”
귀담이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천천히 물었다.
“그래서 늘 먼저 양보하려고 했구나.”
작은 귀담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귀담이는 조용히 아이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다시 덩굴을 바라보았다.
칡이 말했다.
“우리는 서로를 이기려고 싸우는 게 아니야.”
등나무가 이어 말했다.
“그저 각자의 방식으로 빛을 향해
올라가려는 것뿐이지.”
귀담이는 그 말을 오래 생각했다.
갈등이란
누군가가 틀렸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방향을 가진 존재들이
같은 나무를 붙잡았을 때
자연스럽게 생기는 현상일지도 모른다.
잠시 후
숲을 스치는 바람 속에서
하늘나무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담아.”
“갈등은 없애야 할 문제가 아니야.”
“서로 다른 길이
같은 나무를 붙잡았을 때 생기는
매듭일 뿐이지.”
별빛이 잎 사이로 흔들렸다.
“매듭은 억지로 풀면
끊어지거나 더 꼬여버리지.”
“하지만 가만히 바라보면
어느 순간
스스로 느슨해지기도 하지.”
귀담이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덩굴을 다시 바라보았다.
칡과 등나무는 여전히 엉켜 있었다.
하지만 조금 전과는 다르게 보였다.
그것은 싸움이 아니라
각자의 방식으로 하늘을 향해 가는
두 생명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귀담이는 어린 귀담의 손을 잡았다.
“이제 조금 알 것 같아.”
“갈등을 없애려고 애쓸 필요는 없겠구나.”
“그저 엉킨 매듭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부터
시작하면 되는 거였어.”
숲은 조용했다.
그리고 별빛 아래에서 칡과 등나무는
여전히 서로 다른 방향으로
천천히 하늘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자연상태에서는 칡과 등나무가 서로 얽힌 모습을
거의 볼 수 없습니다.
왜냐면 등나무의 경우 거제도에 서식하는
'애기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인위적으로
식재 하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 사람들이 굳이 '갈등'이란
단어를 선택한 것은
그만큼 어려운게 갈등이란 역설이 아닐까요?
다음 9화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