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풍 나와 잠자는 사람들

마침내 또 다른 세상으로 소풍 가는 사람들처럼.

by 김민율


소풍 나와 잠자는 사람들




초여름 무렵, 동네 공원은 낮과 밤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일요일 오후 산책길에 길가 벤치에 누워 모자로 얼굴을 덮고 잠이 든 사람을 가끔 보거나, 이끼 낀 나무 그늘 아래 돗자리를 펴고 누워 잠든 가족의 모습도 보게 된다. 한쪽에서는 몇몇 가족끼리 나무 그늘 아래 돗자리를 펴고 앉아 점심 도시락 바구니에서 김밥과 과일을 꺼내 나눠 먹고 있었는데, 엄마는 잠이 든 어린아이 곁에서 연신 부채질을 해주고 있기도 했다.

매미 울음소리가 울창한 공원은 평화롭고 자유로우며 한가했다. 이곳은 소풍 나온 몇몇 동네 사람들이 더위를 피해 누워있기 좋은 나무 그늘을 찾아 돗자리를 펴고 낮잠을 자며 꿈꾸는 장소이기도 했다. 나무 그늘 아래 엄마 곁에서 잠이 든 아이와 물병을 손에 쥐고 금세 나무에 기대 잠이 든 노인 그리고 동네 세탁소 주인일지도 모를 늙은 여인은 신발을 신고 잠이 든 채, 초여름의 미풍이 살갗을 훑고 지나가는 찰나에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 꿈이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과 이야기로 엮인 세계라면 꿈속에서의 삶을 계속 살고 싶거나, 살고 있다고 믿을 수도 있겠다.


어떤 잠은 우리를 한 번밖에 살지 못하는 이곳에서 꿈이라는 제2의 현실과 두 번째 삶으로 옮긴다. 모든 삶의 무거움과 지난함으로부터 해방되어 새로운 시간과 장소로 엮인 또 다른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악몽뿐인 현실이 계속될 수도 있고,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어느 벚꽃 피는 봄날에 아름다운 연인과의 사랑 이야기가 시작될 수도 있다.

꿈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어떤 사람은 꿈속의 현실이 좋아 하루에 두세 시간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꿈속에서 보내고 싶다고 했다. 깨고 나면 금세 펑, 터져 버려 붙잡을 수 없는 비눗방울 같은 꿈일 뿐이겠지만. 꿈이 현실보다 훨씬 아름답다면 잠의 유혹에 빠져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악몽이든, 재밌고 즐겁고 기분 좋은 꿈이든 꿈꾸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잠은 게으르고 나태한 삶의 낭비가 아니라 한 번도 살아 본 적 없는, 새로운 삶에로의 신비한 모험이다.


사람들은 눕거나 기댈 곳, 몸 가눌 곳이 있다면 어디서든 잠을 잔다. 하루 일과를 끝내고 늦은 밤 샤워를 마친 후 침대에서, 일요일 오후 따스한 햇빛 드는 창가 소파에서 책을 읽다가, 여름휴가철 광안리 해수욕장 파라솔 아래에서, 출근길에 달리는 버스 창가 좌석에 앉아서, 허공에 매달린 지하철 손잡이를 잡고 서서 잠을 잔다. 영화관에서 재미없는 주말 영화를 보다가 자고, 벽에 기대 선 채로 자거나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 점점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감겨 엎드려 자기도 하며, 어떤 농부는 장화를 신은 채 마당에 내놓은 의자에 앉아 햇빛에 그을리며 꾸벅꾸벅 졸기도 한다.

잠은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나 고단하고 휴식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찾아와 잠시 이곳에서의 지난한 삶을 잊게 한다. 죽은 듯이 잠을 자는 사람도 있고, 악몽을 꾸는지 끙끙거리며 불편한 잠을 자는 사람도 있다. 잠깐씩 입가에 미소가 어른거리며 자는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면 무슨 좋은 꿈을 꾸고 있나 보네, 생각할 때도 있다.

스무 살 무렵부터 도시에서의 나의 잠은 불편하고 평온하지 않았다. 악몽을 꾸는 날들이 많았고, 어쩌다 잠이 들어 아침에 눈을 뜨면 내가 정말 잠을 잔 것인지 계속 깨어 있었던 것인지 그 경계가 모호해지기까지 했다. 나무늘보와 박쥐는 가지 끝에 거꾸로 매달려 불안한 잠을 잔다. 나는 이런 동물과는 다른 안전하고 나를 망각할 완전한 잠을 언제나 갈망했다. 내가 잃어버린 순수한 잠! 어린 시절의 잠!

어린 시절, 엄마는 여름밤에 모기향을 피워 놓은 고향집 마당에 돗자리를 깔아놓았다. 어린 자매들은 누워서 삶은 옥수수를 먹으며 몸속으로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별들을 구경하다가 잠이 들곤 했다. 그 시절의 잠은 세상에서 가장 달콤하고 평온하며 따뜻하고 아름다운 잠이었다.


불완전한 잠은 삶을 온전히 살게 하지 못한다. 그날그날의 일을 마치고 잠을 자도 피로한 일상이 매일 반복될 때 즈음, 고향집을 찾아가 세상모르게 잠을 잔 적이 있다. 엄마와 거실에서 함께 잠을 자고 일어난 아침에 엄마가 말했다.

“잘 때 숨소리도 안 나길래, 내가 가만히 귀대고 들어봤다. 죽었나 하고.”

나는 깔깔깔 웃으며 말했다.

“내가 왜 죽어. 근데 내가 잘 때 그래. 숨소리도 안 들리게 자?”

“너무 조용히 자니까 죽은 사람 같았다.”

잠을 잘 자고 난 아침의 나는 살아있는 사람 같지만 그렇지 못한 날 아침의 나는 몰골이 초췌하고 살아있어도 죽어 있는 사람 같았다.


사람은 인생의 3분의 1을 잠으로 보내는데, 잠을 안 자고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아버지는 눕기만 하면 잠이 드는 편이지만 바깥에서 활동하길 좋아하고 일하기 좋아하는 성격이라 어쩔 수 없이 잠을 자야만 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어느 날 늦은 밤에 주무시러 안방으로 들어가시면서 말씀하신 적이 있다. 밤은 왜 만들고 잠은 왜 만들었는지 모르겠다고.

이 세상의 동물들은 모두 잠을 잔다. 전 생애의 80퍼센트 이상을 잠으로 보내는 두발가락나무늘보는 하루 평균 20시간을 자고, 도마뱀은 16시간 이상, 쥐나 햄스터는 13~14시간을 잔다. 아버지를 닮은 소는 하루에 3~4시간 밖에 안 자는데 그런데도 잘 살아간다. 얼마큼 자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불면증 없이, 어떤 악몽도 없이, 살아가는 동안 완전한 잠을 잘 자는 것이 잘 살아가는데 필요할 뿐이다.


잠은 존재의 안과 바깥을 연결해 주는 통로이다. 그 연결 통로를 지나 존재의 안으로 진입하면 또 다른 자기만의 삶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어릴 적, 나는 꿈을 자주 꾸는 사람이었다. 갓 스무 살이 되어 고향집을 떠나 소녀에서 여자로 자라나던 눈부신 한 시절을 지날 즈음에는 고향 마을을 날아다니는 꿈을 자주 꾸거나 물이 흐르는 고향집 안에서 발이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몸이 한없이 가벼워지는 꿈을 꾸었다. 아이였거나 소녀였을 적의 나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열망과 마주했던 아름다운 꿈이었다.

잠을 통하지 않았다면 내 과거와 현재의 숨겨진 무의식적 자아의 정체성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를, 내 삶을 더 잘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어떤 잠은 존재의 비밀을 여는 문으로 들어가는 출입구이다. 어떤 이유로 잠을 잘 자지 못한다면 출입구는 봉쇄되고 내가 다 알 수 없었던 또 다른 나를 발견할 통로는 사라질 것이다.


내게는 평생 동안 하고 싶은 일과 이 생이 끝날 때까지 마치고 싶은 일들, 좋아하는 일들이 몇 가지 남아 있다. 오로지 순수한 잠을 자고 싶다는 욕망은 그 일을 완성하기 위해 내일도 잘 살고 싶다는 것. 현실의 문제들을 잠시 망각한 채 자기 자신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것. 살아남는 법을 배워 오래 살아 있고 싶다는 생존의 기술이기도 했다.

아무도 사지 않아 한동안 숯장수의 창고에 방치되었다는 루소의 <잠자는 집시>에 시선이 오래 머문 적이 있다. 그림 속 여인의 잠은 황홀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그녀는 동그랗게 눈뜬 사자가 꼬리를 꼿꼿이 세우고 자신의 머리카락 냄새를 맡는 것도 모른 채, 깊고 푸른 사막의 밤 한가운데 완전히 자신을 잊은 상태로 순수하고 평온한 잠에 빠져 있었다. 만돌린과 물항아리를 내려놓고. 반쯤 입을 벌려 흰 치아를 드러낸 채. 환한 달빛 아래 무지갯빛 원피스를 입고 오른손에는 지팡이를 쥔 채 사막에 누운 그녀는 꿈꾸는 듯이 보였다. 만돌린 연주에 지쳐 고단한 하루를 잊고 꿈속에서 어떤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있거나 잊을 수 없는 미래의 어느 한순간을, 다른 분위기의 황홀한 삶을 살고 있는 듯 무아경에 빠져 있는 둣한 표정이었다. 어쩌면 고단한 현실을 잊고 신이 준 선물 같은 아름답고 평온하고 더 좋은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좋은 꿈을 꾸다 깨어난 아침에는 금세 잊어버리기 전에 꿈을 적어놓는 버릇이 있다. 꿈속의 풍경을 잊고 지내다가 가끔 꺼내 읽어 보면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내일도 똑같은 꿈을 다시 한번 꾸고 싶거나 보고 싶은 한 사람을 꿈속에서 다시 보고 싶거나 더 좋은 꿈을 꾸고 싶기도 했다. 더 좋은 꿈을 꾸고 싶다는 것은 더 좋은 삶을 살 가능성에 대한 현실적 바람이기도 했다.

매일 꿈을 꿀 때는 두 개의 삶을 동시에 사는 것만 같았다. 잠자리에 누워 오늘은 어떤 꿈을 꿀까, 기대하며 고단한 현실과는 다른 존재 방식, 다른 삶이 궁금해질 때도 있었다. 깨고 나면 꿈은 꿈일 뿐. 어떤 꿈은 무의미하고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끝났지만.

잠이라는 또 다른 시간과 장소로 들어가는 출입문을 사람들은 밤낮으로 열고, 무작위적이고 우연한 사건들로 꾸며지는 예기치 않은 삶의 이야기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어떤 시나리오가 펼쳐질지 알 수 없는 그곳으로.

어떤 사람들은 현실에서 어마어마하게 아름다운 삶을 살 가능성이 희박했다. 몸살 난 어느 일요일에 저물 때까지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쓰고 땀을 뻘뻘 흘리며 죽은 듯이 잠만 잤던 어느 여름날의 나처럼.


공원에 먼저 왔던 몇몇 사람들은 돗자리를 접어 나무 그늘 아래에서 떠나고, 떠난 자리에는 금방 소풍 나온 사람들이 드문드문 자리를 잡았다. 반바지 차림에 나시를 입은 남자는 벌써부터 돗자리를 펴고 누워 자고 있었다.

미래의 어느 한 시점에서 누구나 수평으로 눕는다. 태어날 때도 그러했듯이 죽을 때도 납작, 수평으로 눕는 사람들. 누구나 공통된 운명의 자세로 영원한 잠이 든다. 깃털보다 가볍게. 마침내 또 다른 세상으로 소풍 가는 사람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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