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신유물론적 읽기

상징 디코딩 #014: 기억의 협곡에 피어난 공-산의 정원

by 나인테일드울프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Attila Marcel, 2013)』은 실어증을 앓는 피아니스트 폴(기욤 구익스)이 이웃 마담 프루스트(안느 르 나이)를 만나 잃어버린 기억과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프랑스 영화이다. 실뱅 쇼메 감독의 첫 실사 장편 영화로, 감각적인 영상미와 따뜻한 메시지로 많은 사랑을 받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차례 재개봉되었다.


이 영화는 향기나 맛을 통해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프루스트 현상'*을 영화적 상상력으로 풀어내며, 강렬한 색감과 환상적인 소품들이 어우러져 마치 한 편의 어른들을 위한 동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극 중 흐르는 피아노 연주와 우쿨렐레 선율은 영화의 서정적인 분위기를 완성하는 핵심 요소이다.


익히 알려져 있듯 이 영화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대놓고 오마주 하는 작품이다. 주인공 이름 폴 마르셀, 마담 프루스트, 마들렌과 홍차 등이 모두 그렇다. 소설에서 마들렌이 '비자발적 기억'을 소환하는 문학적 장치였다면, 이 영화에서 마담 프루스트의 약초차와 마들렌은 폴의 신경계와 화학적으로 결합하여 물리적인 반응(최면과 기억으로의 하강)을 이끌어내는 강력한 물질적 행위자이다.


결국 이 영화는 '기억이란 인간의 머릿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지고 맛보고 듣는 모든 물질세계에 스며들어 있으며, 그 물질들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올 때 비로소 잃어버린 시간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훌륭한 신유물론적 우화**로 읽힌다.


* 프루스트 현상: 특정한 향기나 맛을 통해 과거의 기억이 무의식적으로 되살아나는 현상을 말하며,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유래.

** 신유물론: 인간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사물, 물질, 자연 등이 인간과 대등하게 사건을 일으키는 능동적인 ‘행위자’ 임을 강조하는 현대 철학의 흐름.


[스포일러 주의 : 아래 글은 영화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물이 흐른 흔적-계곡, 생이 흐른 흔적-기억

image.png 이 거대한 협곡은 한때 이곳에 물이 흘렀다는 흔적이다. 그리고 기억은 생이 남기는 흔적이다.


영화의 첫 장면 아직 아기인 폴의 시선에 거리의 사람들과 활발하게 인사를 나누는 아빠 아틸라 마르셀(기욤 구익스, 1인 2역)의 뒷모습이 보인다. 그는 곧 벽면에 붙은 그랜드 캐니언의 사진 앞에 서는데, 카메라는 마치 실제 그랜드 캐니언에 서 있는 것처럼 영상을 잡아낸다. 그리고 영화는 이 장면을 마지막에 폴이 실제 그랜드 캐니언에 서 있고, 그의 아내와 아들이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으로 똑같이 재현한다.


협곡이란 무엇인가. 지금은 아니지만 한 때 물이 흐르던 곳이다. 지금 당장 세차게 흐르는 물은 없지만, 과거에 그곳을 깎아냈던 물줄기의 거대한 에너지를 그대로 증명한다. 그리고 삶의 흔적이 기억이라는 점에서 이 협곡은 폴의 잃어버린 유년과 그의 생을 표상한다.


폴에게 부모님의 부재는 마음속에 깊게 파인 협곡과 같다. 물은 이미 말라버렸지만, 그 자리에 남은 거대한 골짜기가 폴의 삶을 규정하고 있다. 그랜드 캐니언의 수만 년의 시간이 층층이 쌓인 단면을 통해 지질의 역사를 탐색하듯, 마담 프루스트가 준 차를 마시고 마주한 폴의 기억의 층 하나하나를 더듬어 가는 것, 그것이 이 영화 전체의 서사이다.


이 영화는 결국 관객에게 '내 안의 깊은 협곡(기억)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기억은 일종의 약초차와 같다. 어떻게 우려내느냐에 따라 독이 되기도 하고 치유가 되기도 한다"는 답을 던진다.


피아노와 기억

image.png 계명 사이의 표현할 수 없는 음처럼, 그의 기억 사이엔 사라진 일화가 존재한다. 피아노 조율사가 폴을 마담 프루스트에게 인도하는 일은 그래서 상징적이다.


악기로서 피아노의 장점은 건반에 해당하는 음을 정확하게 재현한다는 데 있다. 하지만 이는 다양한 음을 표현하지 못하는 한계로 작용하기도 한다. 바이올린으로 대표되는 현악기와 비교했을 때 이 장단점은 두드러진다. 피아노 연주자들은 건반을 누르는 박자와 속도, 타건의 세기, 페달링의 변주를 통해 자신의 창의성을 표현하고자 한다.*


폴이 지닌 생의 기억은 이 피아노와 같다. 계명 사이의 표현할 수 없는 음처럼, 그의 기억 사이엔 사라진 일화가 존재한다. 그것은 이모, 애니(베르나데트 라퐁)와 애나(엘렌 뱅상)가 피아노처럼 그의 기억을 조율한 탓이다. 그렇게 그는 아버지에 대한 왜곡된 기억을 가지고, 이모들이 원하는 피아노 연주 기계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피아노 조율사인 코엘로(루이스 레고)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폴을 마담 프루스트에게 안내한 것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그는 규정된 음을 내도록 조율하는 사람이지만, 역으로 이는 건반의 음을 다르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사라진 음이 다시 드러나게 할 수 있는 조율사, 그가 사라진 기억을 복원할 수 마담 프루스트에게 폴을 안내한다는 것은 매우 상징적이다.


* 재즈 피아니스트 셀로니어스 몽크(Thelonious Monk)는 일부러 인접한 두 개의 건반을 동시에 눌러 묘한 떨림과 불협화음을 만들어냈다.


미셸과의 합주

image.png 미셸과의 합주는 그녀의 인종, 악기의 메커니즘, 민중 계급 이 세 가지를 축으로 하여 이모들의 억압에 완전히 대립하는 세계를 세운다.


현악기는 줄을 짚는 손가락의 미세한 위치 변화, 떨림(비브라토), 미끄러짐(글리산도)을 통해 음과 음 사이의 경계를 허물며 연속적인 소리를 만들어 낸다. 폴을 새로운 생의 감각으로 이끄는 미셸(키 카잉)의 본업이 첼리스트라는 점은 그래서 상징적이다. 저음부터 고음까지 계단식 단절 없이 무한한 스펙트럼의 소리를 내는 첼로의 '탈경계성'은 정해진 건반 안에 갇힌 피아노(규격화된 이모들의 세계)와 완벽하게 대비된다.


특히 미셸이 폴과 합주하는 장면은 매우 흥미롭다. 이모들의 세계는 백인, 프랑스, 부르주아라는 지극히 폐쇄적이고 순혈주의적인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들이 서슴없이 내뱉는 인종차별적 발언은 이 성벽이 얼마나 높고 배타적인지를 보여 준다. 미셸은 '중국계 입양아'라는 존재 그 자체만으로 이모들이 그어놓은 정상성의 경계를 침범하고 흠집을 내는 강력한 타자이다.


클래식 피아노는 거대하고 고상한 귀족 예술의 상징이다. 그런데 미셸은 폴과의 합주에서 서양의 첼로가 아닌 동양의 전통 찰현악기, 중국 민중들의 가장 민중적이고 일상적인 악기인 '얼후'를 연주한다.


이모들이 피아노 건반이라는 딱딱하고 분절된 규칙 안에 폴을 가두었다면, 미셸은 얼후의 활을 켜며 건반과 건반 사이의 '빈 공간'을 현의 연속적인 소리로 채워 버린다. 이는 곧 규격화된 삶 속에서 억압되어 있던 폴의 '사라진 기억(계명 사이의 음)'을 일깨우고 복원하는 물리적인 타격으로 작용한다.


미셸과의 합주는 결국 그녀의 인종, 악기의 메커니즘, 민중 계급 이 세 가지를 축으로 하여 이모들의 억압에 완전히 대립하는 세계를 세운다. 그녀의 직설적 발언에 당황해 도망치긴 했지만, 폴은 둘만의 공간에서 잠시나마 해방감을 느낀다.


안티 오이디푸스

image.png 이 영화는 잘라낸 사진을 다시 이어 붙이듯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복원한다. 프로이트식의 전통적인 정신분석학,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공식을 아주 유쾌하고 따뜻하게 박살 내버린다.


폴이 평생 품고 있던 기억 속에서 아버지는 어머니(파니 투롱)를 괴롭히는 폭력적인 '괴물'이었다. 하지만 마담 프루스트의 정원에서 마주한 진실은 달랐다. 아틸라 마르셸은 자신의 아내와 아들을 누구보다 사랑하고 아꼈던 남자였다. 영화는 프로이트식의 전통적인 정신분석학, 즉 '아버지는 억압자이고 아들은 아버지를 증오하거나 극복해야 한다'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공식을 아주 유쾌하고 따뜻하게 박살 내버린다.


왜곡된 기억이 복원되자 공포와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던 개구리 인형들은 콩쿠르에서 연주를 함께하는 흥겨운 협주자가 된다. 과거의 물줄기가 낸 깊은 골짜기가 나를 가두는 감옥(오이디푸스적 비극)인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그곳은 내가 마음껏 연주하고 뛰어놀 수 있는 광활한 무대였다.


들뢰즈와 과타리가 말한 '안티 오이디푸스'의 핵심은 인간을 억압된 욕망의 노예가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내는 '생산적인 존재'로 보는 것이다. 오랫동안 유럽의 철학, 특히 정신분석학을 위시한 관념론은 인간을 무의식이라는 내면의 감옥에 가두고, 물질세계를 인간의 욕망이 투영되는 수동적 배경으로 전락시켰다.


그러나 두 철학자가 『안티 오이디푸스』를 통해 쏘아 올리고 이후 신유물론자들이 만개시킨 철학적 계보는 이 수직적 위계를 박살 낸다. 이들은 결핍된 내면을 파고드는 대신, 인간의 몸과 비인간 물질(사물, 자연)이 동등한 행위자로서 서로 얽히고 접속하며 세계를 '생산'해 내는 생동하는 유물론의 무대로 우리를 이끈다.


이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은 이런 철학사의 흐름마저 재현하는 영화이다.


생동하는 물질

image.png 피아노는 자신의 살상을 증명하는 흉터를 간직한 채, 매일같이 거실에 웅크리고 앉아 그를 심리적으로 짓누르고 있었다.


미국의 신유물론 철학자 제인 베넷(Jane Bennett)은 사물이 단순히 죽어있는 수동적 대상이 아니라,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고 사건을 발생시키는 능동적 힘을 가진 '생동하는 물질(Vibrant Matter)'*이라고 보았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악기들 역시 폴의 삶을 쥐고 흔드는 강력한 비인간 행위자들이다.


피아노는 단순히 이모들이 폴에게 강요한 악기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과거에 폴의 부모를 물리적으로 덮쳐 목숨을 앗아간 '폭력적인 행위자'이다. 부서진 장식이 여전히 붙어있는 그 거대한 피아노는 자신의 살상(?)을 증명하는 흉터를 간직한 채, 매일같이 폴의 거실에 웅크리고 앉아 그를 심리적으로 짓누른다. 인간(부모)을 파괴한 물질이 이제는 남은 인간(폴)의 삶마저 통제하고 억압하는 주체로 군림하고 있었다.


image.png 빗방울의 타건이 우연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우쿨렐레가 폴을 향해 말을 거는 적극적인 '호명'처럼 들린다.


그리고 우쿨렐레를 마담 프루스트의 무덤에 두고 오려는 장면에선 신유물론적 사물의 행위성이 보다 극적으로 드러난다. 폴이 우쿨렐레를 내려놓음으로써 관계를 끝내려 한 순간, '비'라는 자연의 물질과 '우쿨렐레의 현'이라는 사물이 만나 인간의 개입 없이 스스로 진동하며 소리를 낸다. 영화는 이 빗방울의 타건을 우연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우쿨렐레가 폴을 향해 말을 거는 적극적인 '호명'으로 연출한다. 제인 베넷이 말한 생동하는 사물의 힘이 폴의 발걸음을 돌려세우고, 기어이 그가 자신을 품에 안고 돌아가도록 행동을 유발한 것이다.


폴은 자신을 속이고 짓누르던 피아노를 단순히 도끼로 부숴버리거나 내다 버리지 않는다. 대신 그는 피아노 뚜껑을 열고 그 안에 흙을 채워 생명이 자라는 '화단'으로 개조해 버렸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적 관점에서 보면, 그는 억압적인 기계를 해체하여 완전히 다른 기능을 수행하는 새로운 욕망의 기계(식물을 키우는 기계)로 재조립했다. 부모를 죽게 한 살상 무기이자 자신의 유년을 박제했던 관(棺)과 같았던 사물이, 이제 푸릇푸릇한 생명을 품고 길러내는 어머니의 자궁 같은 공간으로 뒤바뀐 것이다.


* 생동하는 물질: 제인 베넷의 개념으로, 사물이 단순히 고정된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를 조직하고 다른 존재에 영향을 미치는 생기(Vitality)를 지니고 있다는 의미.


공-산(Sympoiesis)과 내부작용의 정원

image.png 폴은 아픈 상처의 지층 위에서 식물, 사물, 인간이 공생하는 '반려종'의 거주지를 만든다.


카렌 바라드(Karen Barad)의 개념을 빌리자면, 마담 프루스트가 벌목될 나무와 자신의 이마에 똑같이 'X'를 그리는 행위는 단순한 공감적 '상호작용(Interaction)'이 아니다. 이는 죽음을 앞둔 인간의 육체와 식물의 육체가 하나의 '취약한 생명'으로 응집되는 강력한 '내부작용(Intra-action)'*이다. 둘은 이미 분리될 수 없는 얽힘 속에 존재한다.


이런 관점에서 폴의 치유 역시 개인의 고립된 성찰(Autopoiesis)이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이 얽히는 도나 해러웨이적 '공-산(Sympoiesis, 함께-만들기)'**의 과정이다. 빗방울과 얽히며 스스로 공명하는 우쿨렐레, 혈관을 타고 흐르는 홍차와 마들렌, 미셸이 켜는 얼후의 활기찬 진동까지. 이 모든 비인간 행위자들과의 얽힘이 폴이라는 새로운 주체성을 공생발생(Symbiogenesis)시켰다.


영화의 마지막, 폴이 피아노의 뚜껑을 열고 흙과 물을 부어 꽃을 피워내는 장면은 이 복수종의 얽힘이 도달한 궁극적 세계다. 그는 부모를 덮쳤던 죽은 나무의 시체(피아노)를 거실 한가운데 두고, 그 안에 흙과 씨앗이라는 타자들을 투입한다. 이는 과거를 지우거나 억압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아픈 상처의 지층 위에서 식물, 사물, 인간이 공생(Multispecies symbiosis)하는 '반려종(Companion Species)'***의 거주지를 만들어내는 행위다. 폴은 비로소 자기 삶의 협곡에 생명의 물을 흘려보내며, 스스로 공-산의 정원사가 되었다.

* 내부작용: 카렌 바라드의 개념. 독립된 개체들이 만나서 소통하는 ‘상호작용(Interaction)’과 달리, 행위자들은 관계 맺음(얽힘)을 통해서만 비로소 고유한 특성을 드러내며 존재하게 된다는 의미.

** 공-산: 도나 해러웨이의 용어로, ‘함께-만들기’를 의미. 개별 단독자가 스스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존재들이 서로 얽히며 함께 세계를 생성해 나가는 과정.

*** 반려종: 인간과 개, 기계와 유기체처럼 서로 다른 종들이 역사적, 생물학적으로 얽혀 서로의 삶을 직조해 나가는 동반자적 관계를 의미.



결론: 얽힘의 정원에서 피어나는 공-산의 삶

영화 겨울 나그네에서 주인공 민우는 자신의 출생을 비극의 근원으로 인식했다. 운명론적 결핍에 사로잡힌 그는 스스로를 과거의 덫에 가두었고, 결국 비극의 소용돌이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했다. 이는 전통적인 정신분석학의 굴레, 즉 오이디푸스적 비극에 갇혀 무너져내리는 인간의 전형이다.


하지만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은 완전히 다른 구원의 경로를 제시한다. 폴은 부모의 죽음이라는 거대한 과거의 협곡에 매몰되지 않는다. 마담 프루스트의 정원을 통과하며, 그는 자신의 내면에만 파고드는 대신 외부의 '비인간 행위자들'과 적극적으로 접속한다. 스스로 목소리를 내는 우쿨렐레, 규격을 부수는 얼후의 진동, 그리고 흙과 빗물 같은 사물들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그는 수동적인 기계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주체로 거듭난다.


결국 이 영화는 상처 입은 단독자가 고립된 자기 연민을 넘어, 타자들과의 '함께-되기(Becoming-with)'를 통해 어떻게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내는지를 묘사한다. 억압의 도구였던 피아노 뚜껑을 열고 그 안에 흙과 씨앗을 심어 복수종이 살아가는 화단으로 재조립한 폴의 마지막 모습은 이 철학적 여정의 완벽한 도착지다. 폴이 척박했던 기억의 지층 위에 틔워낸 것은, 나와 비인간 타자들이 서로의 결여를 채우며 얽히는 찬란한 '공생발생(Symbiogenesis)'의 삶이다.



image.png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Attila Marcel, 2013)』


수, 토 연재
이전 25화무뢰한: 안전한 이입의 끝에서 마주한 씁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