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동하는 물질의 역풍, 생태주의로 읽는 영화: 정점

상징 디코딩 #015: 살인마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 대자연의 묵시록

by 나인테일드울프
시네마 디코딩의 마지막 글입니다. 후기는 다음 연재 기일인 토요일에 맞춰 올리겠습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정점(Apex, 2026)』은 표면적으로 장르적 쾌감에 충실한 서바이벌 액션 스릴러다. 불의의 사고로 남편 토미를 잃은 사샤(샤를리즈 테론)가 뼈아픈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호주 블루 마운틴의 험준한 대자연 속으로 홀로 카약 여정을 떠나고, 그곳에서 잔혹한 인간 사냥꾼 벤(테런 에저턴)을 만나 벌이는 처절한 사투를 그린다. 쫓고 쫓기는 팽팽한 긴장감과 맨몸 액션이 영화의 뼈대를 이루지만, 이 작품을 단순한 살인마와 희생자의 추격전으로만 소비하기엔 깎아지른 절벽과 요동치는 급류가 뿜어내는 묵직한 물성(物性)이 너무도 압도적이다.


본 글에서는 앞서 다루었던 영화 『기차의 꿈』『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비평의 연장선상에서, 이 영화가 품고 있는 묵직한 생태학적 메타포를 독해해 보고자 한다. 제인 베넷(Jane Bennett)의 '생동하는 물질(Vibrant Matter)' 개념과 펠릭스 과타리(Félix Guattari)의 철학을 렌즈 삼아 들여다본 『정점』은, 거대한 대자연이라는 '비인간 행위자' 앞에서 인간 중심적인 오만함이 어떻게 붕괴하는지를 보여주는 서늘한 우화로 읽힐 수 있다.


사샤의 생존 사투는 단순히 미치광이 살인마로부터 도망치는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을 정복하려 했던 인간의 오만이 만들어낸 환경적 '역풍(Blowback)'과 직면하고, 무심한 대자연 앞에서 인간의 취약함을 뼈저리게 자각하는 철학적 통과의례다. 이제 무심한 수직의 절벽에서 시작해 격동하는 기억의 급류를 거쳐, 마침내 낡은 이분법을 깨부수고 온전한 생존의 '정점(Apex)'에 오르는 사샤의 험난한 여정을 따라가 보자.


[스포일러 주의 : 아래 글은 영화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앗아간 자연(自然)

image.png 이 영화는 극장에서 개봉하지 않은 것이 아쉬울 정도로, 압도적인 자연 풍광을 스펙터클 하게 조망해서 충분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노르웨이 롬스달렌(Romsdalen)에 위치한 트롤 벽(Troll Wall, Trollveggen)유럽에서 가장 높은 수직 암벽이다. 해발 약 1,100m~1,700m에 이르는 웅장한 편마암 절벽으로, 험준한 지형과 낙석 위험으로 유명하며, 암벽등반가와 베이스 점퍼들의 성지이다. 영화의 첫 장면은 바로 이곳을 등반하는 커플을 비춘다.


사샤는 정상에 오르는 것에만 집중하며 과감하게 등반을 서두른다. 반면 토미(에릭 바나)는 이 보다 신중한 자세를 취한다. 돌출부를 오르는 상황에서 여러 차례 실패하지만 그녀는 당장에 오를 생각만 해서 재도전을 고집한다. 그녀의 체력과 몰려오는 악천후를 고려해서 포타레지를 설치하고 휴식을 결정하는 것은 토미이다.


이 첫 시퀀스에서 두 사람의 역할을 통해 주인공 사샤의 자연에 대한 태도가 드러난다. 토미는 자연 안에 도사린 창발적 위험에 대해 잘 안다. 비인간행위자로서의 기후는 그가 말하는 운이라는 자원을 순식간에 소모시킬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실패와 철수를 염두에 둔 자세로 등반에 임한다. 하지만 사샤는 그러한 가능성을 모두 일축하는 자세를 지닌다. 운이라는 통제할 수 없는 변수를 근거로 삼는 토미를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자신의 의지와 기술로서 정복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만 이 절벽을 대하고 있다.


사샤의 이런 태도는 자연을 극복 혹은 정복 가능한 대상으로만 여기는 인간중심적 사고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반면 토미는 대자연이 인간의 뜻대로 예측되거나 통제될 수 없는 거대한 '비인간 행위자'임을 겸허히 인정하는 인물이다. 결국, 계속 악화되는 기상으로 인해 토미의 의견에 따라 둘은 철수를 감행한다.


image.png 압벽을 등반하는 이 커플에게 『클리프 행어』와 『버티컬 리미트』같은 영화에서 봤던 사고가 익숙한 형태로 일어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일어난 눈사태는 토미의 비극적 추락사로 이어지고 만다. 사샤의 용기가 근거 없는 만용이었음을 증명하는 순간이다. 트롤 벽은 사샤의 열망이나 토미의 비극과는 무관하게, 그저 스스로 존재하는 '거대한 물리적 무심함'으로서의 생동하는 물질이다. 그것은 누군가를 벌하기 위해 눈사태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중심적인 의미 부여가 거세된 채 그저 중력이라는 무심한 물리력을 행사할 뿐이다.


하지만 관객과 사샤에겐 자연이 주는 압도적인 공포를 실감케 한다. 이는 이전의 『기차의 꿈』을 다룬 글에서 인용한 임유영 시인의 "있음을 없음으로 만들 수 있는 무시무시한 힘"이 떠오르게 하는 장면이다.


기억의 협곡을 파고드는 거친 물

image.png 암벽 등반을 대신해 선택한 급류 타기라는 새로운 취미는 사샤가 트라우마에 맞서는 태도를 드러낸다. 급류의 물살은 그녀의 내면과 공명하는 역동적 행위자이다.


수직의 암벽에서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샤는, 이제 수평으로 흐르는 거친 물살에 몸을 맡긴다. 암벽 등반을 포기하고 급류 타기(카약)로 전향한 그녀의 일상은 겉으로는 잔잔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겪고 있는 외상 후 스트레스와 기억의 본질은 고요하게 고여 있는 호수가 아니라,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맹렬한 '급류(Rapids)'와 같다.


사샤의 내면은 과거에 대한 짙은 회한과 사랑했던 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 그리고 불쑥불쑥 떠오르는 낭만적인 추억들이 뒤엉켜 끊임없이 요동치고 있다. 고요하게 흘러가다가도 순식간에 굽이치며 하얀 포말을 일으키고 기어이 배를 뒤집어버리는 거친 물살은, 곧 그녀의 일상을 예고 없이 덮치는 트라우마의 역동적인 흐름 그 자체다.


이 지점에서 사샤가 뛰어든 급류는 단순한 비유를 넘어, 앞선 트롤 벽의 거대한 '무심함'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녀의 내면과 공명하며 끊임없이 몸을 타격하는 '역동적 행위자'로서의 생동하는 물질인 것이다. 고여 있는 기억을 강제로 흐르게 만들고 사샤를 기억의 심연으로 밀어 넣는 물살의 운동성은, 자연이 그저 정지된 배경이 아니라 인간의 신경계와 직접 물리적으로 반응하는 능동적인 물질임을 증명한다.


그녀가 수직의 암벽 대신 수평의 물살을 택한 것은 단순한 도피가 아니다. 자신의 내면을 잠식한 트라우마와 더욱 능동적으로 맞붙으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카약을 타고 거친 포말 사이를 뚫고 나가는 행위는, 그 거센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거나 잠기면서도 결코 회피하지 않겠다는 선언과도 같다.


특히 절벽 위에서 망설임 없이 거센 물속으로 뛰어내리는 장면은 그녀의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녀는 자신을 짓누르는 공포와 정면으로 마주한다. 이는 공포를 두려워하며 뒷걸음질 치는 태도가 아니라, 오히려 그 공포의 한복판으로 자신을 던져 넣는 행위다. 비록 간간이 회한에 젖은 표정을 지으며 과거라는 기억의 심연에 잠기기도 하지만, 그녀는 결코 그 흐름으로부터 도망치지 않는다. 두려움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두려움이 만드는 거친 물살의 한가운데로 자신을 던짐으로써 사샤는 비로소 '자연'이라는 거대한 비인간 행위자와 다시금 능동적으로 연결되기 시작한다.


image.png 첫날 급류 타기의 끝에서 마주하는 실종자들의 흔적은 이 여행의 목적이 결국 트롤의 벽에서의 마주한 죽음과도 관련이 있음을 암시한다.


그래서 그녀의 급류 타기의 첫날의 행적 끝에 마주하는 실종자들의 흔적은 이 여행의 목적을 상기한다고 볼 수 있다. 트라우마를 피하지 않고 거친 물살 한가운데로 자신을 던진 사샤는, 마침내 그 심연의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던 죽음의 실체와 마주하게 된 것이다. 그녀의 급류 타기는 단순한 익스트림 스포츠나 내면적 애도를 넘어, 자신을 파괴했던 통제 불가능한 공포의 한복판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 기어이 승부를 보겠다는 처절하고도 숭고한 통과의례였음이 이 흔적들을 통해 명확해진다.


자기 파괴적 오만함

image.png 초반에 등장하는 이 사냥꾼들은 서사적으로는 불필요해 보이지만, 이들이 만들어내는 불쾌함과 공포는 벤에게 그대로 응축되는 효과가 있다.


사샤는 급류를 타기 위해 호주의 완다라 국립공원을 찾는다. 여정의 시작인 주유소에서 그녀는 무례하게 치근덕거리는 사냥꾼 무리와 마주친다. 이후 벤의 안내로 도착한 야영지에서 다시 맞닥뜨린 이들은 오랜 시간 사냥감을 해체하며 사샤를 위협적인 분위기로 압도한다. 고립된 공간에서 무장한 남성 무리와 홀로 남겨진 여성이라는 설정은 극도의 긴장감을 자아내지만, 정작 이 장면은 아무런 직접적인 충돌 없이 허무하게 마무리된다. 이들은 이후 서사에서 완전히 소멸하며, 영화적으로는 맥락 없이 삽입된 '미완성의 파편'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 영화적 불협화음은 주제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 서사적 긴장감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고 중단해 버리는 이 장면의 투박함은, 역설적으로 이들이 영화 속에서 '사건의 주체'가 아니라 '인간 중심주의적 태도의 표상'으로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후에 벤은 "선량한 사냥꾼은 야생 자연을 존중하고 사냥한 동물을 최대한 활용"하지만 그들은 아니라며 그 천박함을 꼬집는다. 그들은 단순히 인간으로서의 무례함뿐만 아니라, 자연과 생명을 그저 유희와 착취의 대상으로만 소비하는 '자기 파괴적인 생활양식'의 전형을 나타내는 존재들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의 신유물론 철학자 제인 베넷(Jane Bennett)은 자신의 저서 『생동하는 물질』에서 미국의 공중(public)이 환경의 변화와 대 이라크전과 같은 전쟁의 참상을 맞닥뜨린 후, 자신들의 생활양식이 지닌 자기 파괴적인 특징에 주목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이 사냥꾼들은 자연을 그저 유희와 착취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며 오만하게 군림하려는 인간 중심주의의 민낯, 인류가 새롭게 발견한 자신들의 모습을 표상한다.


결국 이 장면은 영화적 완성도라는 측면에서는 결함일지 모르나, 비평적 관점에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정거장이다. 사샤가 지닌 '정복 가능한 자연'이라는 태도와 사냥꾼들의 '착취 대상으로서의 자연'이라는 태도는 인간 중심주의라는 한 뿌리에서 나온 두 가지 줄기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보여준 오만한 낭비와 잔혹함은 생태계 내부에 보이지 않는 '고통'을 축적하며, 이는 곧 사샤와 인간 문명이 마땅히 감내해야 할 거대한 '역풍(Blowback)'의 실체인 벤을 소환하는 주제적 당위성이 된다.


자연의 역습에 대한 공포

image.png 벤은 '자기 파괴적 생활양식이 불러온 환경적 역풍이 인간의 육체를 빌린 잔혹한 거울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앞서 그녀의 급류 타기를 트라우마에 맞서는 능동적 자세라고 평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상대적 평가일 뿐이다. 사샤가 암벽 등반 대신 새로운 취미 영역으로 전향한 것은 그곳에서 마주한 공포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음을 나타낸. 그녀의 심상에선 여전히 자연은 압도적인 공포로 자리를 잡고 있다. 그리고 이 공포는 그녀가 마주하는 그 어떤 대상에게도 충분히 투사될 수 있다.


이렇게 봤을 때 벤은 단순한 사이코패스 살인마가 아니다. 생물학적으로는 인간일지 모르나, 그는 사회적이고 문명적인 '인간성'을 철저히 거세한 채 호주 오지의 야생 생태계로 완전히 편입된 존재다. 사샤의 공감 어린 대화를 철저히 묵살하고, 짐승처럼 뾰족하게 갈아낸 이빨을 드러내는 그의 모습은 인간의 정체성을 버리고 스스로를 야생의 '물리적 포식자'로 개조했음을 보여준다.


앞서 사냥꾼들이 보여주었던 인간 중심적인 잔혹함과 착취의 논리는 숲에 축적되고, 벤은 그 맹목적인 폭력성을 고스란히 흡수하여 오히려 인간(사샤)을 향해 되돌려준다. 즉, 그가 행하는 인간 사냥은 제인 베넷이 경고한 '자기 파괴적 생활양식이 불러온 환경적 역풍(Blowback)'이 인간의 육체를 빌려 잔혹한 거울상으로 체화된 결과다. 관리 당국은 그간의 실종이 "이 지역의 험준한 지형과 야생 동물 탓"인 줄 알았으나, 사실 벤이 이미 그 험준한 지형과 맹수들의 폭력성과 완벽히 동화되어 생태계의 새로운 '정점(Apex)'으로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영화는 벤을 통해 "있음을 없음으로 만드는" 자연의 무시무시한 힘을 직유처럼 연결해 낸다.


이러한 벤의 정체성은 영화가 그의 기원(Origin)과 서사를 철저히 생략하는 '의도된 불가해성'을 통해 더욱 확고해진다. 장르 영화의 관습을 따르자면 살인마에게는 과거의 상처나 동기가 주어지기 마련이다. 사샤 역시 벤의 어머니 사진을 보고 과거를 넘겨짚으며 어떻게든 그를 이해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려 시도한다. 이는 미지의 공포를 전통적인 정신분석학의 틀, 즉 오이디푸스적 결핍의 서사 안에 가두어 통제하려는 문명화된 인간의 시도다.


하지만 벤은 사샤의 이러한 접근을 철저히 묵살한다. 그가 보여주는 무심함은 임유영 시인이 통찰한 "자연은 인간의 생사에 관심이 없다"는 대자연의 서늘한 속성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자연은 그저 '스스로 그러할 뿐', 인간의 얄팍한 서사적 인과율로 해석되거나 설득되는 대상이 아니다.


나아가 벤이 스스로 고통을 감내했다며 짐승처럼 갈아낸 뾰족한 이빨을 드러내는 기괴한 장면에서 보는 이는 생경한 공포를 느낀다. 이 이빨은 스릴러 장르에서 살인마에게 흔히 나타나는 단순한 광기의 표현만은 아니다. 벤이 스스로 갈아낸 뾰족한 이빨은 트롤 벽의 무심함과는 대조적으로, 훼손된 자연의 고통이 날카로운 물리적 실체로 '응축'되어 나타난 생동하는 물질의 또 다른 얼굴이다. 이는 인간의 오만함이 불러온 '역풍(Blowback)'이 벤이라는 육체를 빌려 가장 공격적이고 구체적인 물질성을 획득한 순간이다.


결국 영화는 벤의 인간적인 동기를 소거하고 그를 완벽히 불가해한 존재로 남겨둠으로써, 한낱 연쇄살인마를 통제 불능의 거대한 '재난'이자 생태학적 역풍 그 자체로 격상시킨다.


결론: 낡은 이분법과의 작별, 버려진 나침반

image.png 그녀가 최종적으로 벤을 낭떠러지에 떨어뜨리는 것은 자신 안에 도사리던 자연에 대한 공포와의 절연이다. 영화 초반 남편의 낙사장면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작금의 기후 위기 속에서, 자연을 벤이 상징하는 공포스러운 존재로 대하는 태도는 유효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까. 정복 혹은 착취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난폭한 가해자라는 표상 또한 인간 중심적 사고가 투영된 관념일 뿐이다. 우리는 기차의 꿈에서도 애런 피플스의 생명을 거두고, 그레이니어의 가족을 휩쓸어간 자연을 바라보며 동일한 문제의식을 진단했었다.


70년대 이후의 환경주의는 흔히 인간의 파괴적 행위가 불러올 대자연의 '역풍'에 대한 공포에 기반을 두고, 인간의 개입을 제한하고 축소하는 데 주력해 왔다. 그러나 이 수동적인 관념 속에서 자연은 여전히 분리된 타자로 남는다. 제인 베넷은 이러한 공포 기반의 생태주의가 지닌 지속가능성을 의심하며, 1986년 펠릭스 과타리의 통찰을 인용한다. 과타리에 따르면, 이 행성의 건강은 "점점 더 인간의 개입에 의지하고 있으며", 미래에는 단순히 자연을 보호하고 방어하는 수동적 태도를 넘어 "대기 중의 물질적 관계를 통제하기 위한 거대한 프로그램을 세우는" 적극적 개입이 요구된다.


과타리가 예견한 이 '적극적 개입'의 필요성은 영화 후반부 사샤의 행위를 통해 강렬하게 서사화된다. 사샤가 벤의 다리를 부러뜨려 자신에게 의지하도록 강제하는 것은, 맹목적인 공포(자연의 역풍) 앞에서 도망치거나 숨는 대신 생존을 위해 그 물질적 조건을 직접 재배치하는 주체적인 개입이다. 카렌 바라드의 '내부-작용(Intra-action)'이나 도나 해러웨이의 '공-산(Sympoiesis)' 역시 기후 위기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비인간 타자들과 새롭게 얽히며 행위할 것인가를 묻는 개념이지, 결코 거대한 자연을 달래며 뒷걸음질 치는 수동성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쫓고 쫓기는 공포의 수동성에서 벗어나, 부러진 다리라는 물리적 한계를 매개로 벤과 임시적인 연대를 맺는 사샤의 결단은 과타리가 말한 '미래의 프로그램'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과 맞닿아 있다. 두려움에 질려 도망치는 대신 그 공포의 다리를 꺾어 생존의 도구로 얽어맨 사샤는, 마침내 낡은 이분법을 벗어던지고 온전한 생존의 '정점(Apex)'에 서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최종적으로 벤을 낭떠러지에 떨어뜨리는 것은 자신 안에 도사리던 자연에 대한 공포와의 절연이다. 사샤는 이 절연 이후 영화 초반에 등반에 실패했던 것과 비슷한 돌출부를 넘어서 암벽의 정상에 오른다. 영화 초반의 그녀가 대자연의 압도적인 힘을 알지 못해 두려움조차 느끼지 못했던 '무지한 오만'의 상태였다면, 지금의 그녀는 그 공포의 실체를 뼈저리게 경험하고도 기어이 그것을 딛고 일어선 존재가 된 것이다. 사샤는 마침내 완다라 국립공원 밀림의 전체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자리, 정점에 선다.


살아남은 그녀가 남편의 유품이자 문명의 상징인 나침반을 바다에 던져버리는 결말은 그래서 깊은 여운을 남긴다. 그것은 자연을 완벽히 정복하고 계산할 수 있다는 과거의 오만함과, 자연을 맹목적인 공포의 괴물로만 대하던 왜곡된 시선 양쪽 모두와의 완전한 작별이다.



image.png 『정점(Apex, 2026)』


수, 토 연재
이전 29화추락한 새가 남긴 1분의 마법, 아비정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