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한 새가 남긴 1분의 마법, 아비정전

상징 디코딩 #015: 이별이 예정된 도시의 기원, 아비

by 나인테일드울프

왕가위 감독의 1990년 작 『아비정전(阿飛正傳, Days of Being Wild)』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왕가위적 세계'의 진정한 서막을 연 작품이다. 개봉 당시에는 당대 유행하던 액션 누아르를 기대했던 관객들에게 철저히 외면받으며 환불 소동까지 빚었던 이른바 '저주받은 걸작'이기도 하다. 비록 훗날 『화양연화』가 도달한 압도적인 마스터피스의 반열에 놓기엔 다소 거칠고 미완의 구석이 있을지라도, 우리가 열광하는 왕가위 특유의 미학과 상징이 날것 그대로 꿈틀대는 최초의 원점이라는 사실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대중은 흔히 이 영화를 흰 러닝셔츠 차림의 장국영이 맘보춤을 추는 매혹적인 씬이나, "1분"이라는 찰나의 시간으로 여자를 유혹하는 치명적인 로맨스로 기억한다. 하지만 허공을 맴돌며 그 누구에게도 온전히 정착하지 못하는 한 남자의 쓸쓸한 궤적 아래에는, 상상 이상으로 묵직하고 비극적인 심리적, 지정학적 텍스트가 묻혀 있다.


앞선 글들을 통해 『중경삼림』이 유한한 시간 앞의 절박함을, 『화양연화』가 이별이 예정된 도시의 우울과 엇갈린 페르소나를 그렸음을 살펴보았다면, 『아비정전』은 이 모든 왕가위적 상징과 모티프가 탄생한 기원이자 요람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영화를 단순한 청춘의 방황이라는 멜로의 틀에서 벗어나, 보다 깊은 심연의 렌즈로 재해석해 보고자 한다. 칼 융(Carl Jung)의 분석심리학이 제시하는 아니마(Anima)의 파편과 투사의 실패, 영국과 중국 사이에서 부유하던 식민지 홍콩의 고아적(Orphan) 무의식, 그리고 마침내 '시간을 가두는 예술'이라는 매체의 본질적 선언까지.


단 1분의 찰나를 영원으로 박제하고 싶었던 발 없는 새의 비행, 그 눈부시고도 부조리한 날갯짓의 흔적을 지금부터 하나씩 디코딩해 보자.


[스포일러 주의 : 아래 글은 영화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비가 찾는 아니마(Anima)

image.png 아비 내면의 여성성의 원형은 둘로 분열되어 있다. 그리고 이는 소려진과 미미라는 현실의 여성과 조응한다.


『화양연화』를 다룬 이전 글에서 주모운과 소려진이 무의식의 층위에서 원형적으로 결합했으나, 페르소나에서는 결코 융합할 수 없는 정체성의 모순으로 끝내 헤어지고 마는 사이임을 말했다.


이 영화의 아비(장국영), 소려진(장만옥), 미미(유가령) 이 세 사람의 관계도 비슷한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일단 아비에게 있어서 진정한 아니마 투사 대상은 오직 '자신을 버린 친어머니'라는 거대한 블랙홀에 고정되어 있다. 그가 찾으려 했던 아니마는 완전한 대상이 아니라 파편화된 조각들에 불과하다. 아비가 두 여자에게서 잠시나마 투사했던 아니마의 파편들을 들여다보자.


먼저 소려진은 정적이고 헌신적이며 안정감을 주는 인물이다. 즉 아비는 소려진에게서 '조건 없는 수용과 따뜻한 품'이라는 모성적 아니마의 파편을 본다. 융의 아니마 발달 단계로 보면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여성상에 가깝다. 아비가 그녀를 유혹한 것은, 그녀가 주는 위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영원한 정착을 요구하자 아비는 도망친다.


다음으로 미미에게서는 '길들여지지 않은 원초적 에너지(에로스)'라는 아니마를 본다. 또한, 자신에게 집착하는 미미를 마음대로 휘두르며 우월감을 느낀다. 이는 자신을 지배하려 드는 양어머니에 대한 반발심과도 연결된다. 아비는 양어머니 레베카(반적화)에게 느끼는 애증과 무력감을 보상받기 위해, 미미라는 여성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지배함으로써 자신의 남성성과 권력을 확인하려 한다. 미미는 아비의 억눌린 파괴적 에너지를 해소하는 배출구 역할을 한다.


아비에게 여성성이란 자신을 버린 ‘친어머니’와 자신을 돈으로 통제하려는 ‘양어머니’로 극단적으로 분열되어 있다. 그리고 그는 정확하게 이에 대응하여 려진을 버리고, 미미를 지배하는 방식으로 여성과 관계를 맺는다.


발 없는 새의 비극

image.png 아비는 두 국가의 문화적 정체성 사이에서 결코 하나로 융합하지 못한 채 떠도는 홍콩의 무의식 그 자체를 표상한다.


아비가 필리핀에까지 찾아갔으나 끝내 친모와 만날 수 없었던 기원의 부재는, 표면적으로는 존재하나 실제로는 도달할 수 없는 그의 텅 빈 근원을 상징한다. 그리고 이는 중국으로부터 떨어져 나왔으나 확실한 영연방으로서의 소속감을 느낄 수 없는 홍콩이라는 도시의 정체성과도 맞닿는다.


아비를 통제하려 드는 양어머니 영국은, 1984년 중영공동선언으로 반환이 확정되기 전까지 홍콩에 그 어떤 온전한 서구적 정치 시스템이나 자치권도 허락하지 않았다. 영국에게 홍콩은 정치적 주체성이 철저히 배제된, 단지 자본주의적 번영만을 허락받은 식민지 기지에 불과했다. 아비가 양어머니가 주는 풍요를 누리면서도 끊임없이 반항하고 겉도는 이유는 바로 이 주체성의 결여에서 기인한다.


그렇다고 해서 친모라 할 만한 중국에게 동질감을 느끼기엔 지나온 역사의 궤적이 너무도 달랐다. 1960년대의 홍콩인 다수는 소려진의 경우처럼 대륙의 이념적 격랑을 피해 도망쳐 온 이주민들이었다. 친어머니(티타 무뇨스)가 아비의 방문을 끝내 거부했듯, 이들에게 중국은 혈연적 뿌리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안길 수 없는 낯설고 두려운 타자에 불과했다.


결국 아비는 두 어머니 사이에서, 그리고 두 여성이 지닌 문화적 정체성 사이에서 결코 하나로 융합하지 못한 채 떠도는 홍콩의 무의식 그 자체를 표상한다.


이야기를 이루는 두 축

양어머니-영국-미미-왜자

image.png 미미는 필리핀이라는 '물리적 공간'까지 직접 쫓아가지만, 그녀는 끝내 아비의 세계에 진입하지 못한다.


이 영화에는 아비를 기점으로 분기되는 두 가지의 이야기가 있다. 먼저 제1의 축은 물질과 자본이 흐르는 '양어머니-영국-미미-왜자'라는 라인이다. 양어머니는 돈으로 아비를 통제하려 했고, 이는 경제적 번영으로 식민지를 통제했던 영국과 겹친다. 이 라인에 서 있는 미미 역시 아비의 '육체적 점유'를 갈망하며, 왜자는 아비의 물질적 유산(차)을 자본(돈)으로 환산하여 미미의 물리적 이동을 돕는다.


하지만 이 선의 흐름은 최종적으로 아비에게 닿지 못한다. 미미는 왜자(장학우)의 돈을 들고 필리핀이라는 '물리적 공간'까지 직접 쫓아간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아비의 세계(친어머니의 저택이나 기차 안)에 진입하지 못하고 겉돌고 만다. 자본과 물질의 힘으로는 한 인간의 근원적인 결핍과 정체성의 심연에 가닿을 수 없음을 보여주는 서글픈 결과라 할 수 있다.


친어머니-중국-소려진-초자

image.png 려진은 물리적으로 아비를 쫓아가지 않지만 그녀의 감정과 기억은 초자라는 매개체를 통해 바다를 건너 아비에게 당도한다.


제2의 축은 '친어머니-중국-소려진-초자'로 이어지며, 이 라인은 철저하게 '근원, 규범, 정신적 유대'를 중심으로 묶여 있다. 친어머니는 닿을 수 없는 기원(중국)이다. 『화양연화』에서처럼 소려진은 수천 년간 이어져 온 혈연, 문화, 예의라는 문화적 원형에 뿌리를 둔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표상하는 인물이다. 초자(유덕화) 역시 이 사회의 치안과 규범을 수호하는 자이자, 려진의 상처(기억)를 묵묵히 공유하는 정신적 전승자라 할 수 있다.


려진은 미미처럼 물리적으로 아비를 쫓아가지 않는다. 그저 홍콩에 남아 자신의 정체성(안정된 삶과 규범)을 지킨다. 하지만 그녀의 감정과 기억은 초자라는 매개체를 통해 바다를 건너 아비의 임종 순간에 정확히 당도한다. 이는 훗날 『화양연화』에서 싱가포르의 빈방까지 홀로 찾아간 소려진이 끝내 모운과 만나지 못한 채 결코 떼어낼 수 없는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남긴 짙은 흔적을 남기고 회귀했던 것과 완벽히 겹쳐진다. 몸과 물질은 닿지 못해도, 그 지독한 정체성과 기억의 궤적만큼은 시공간을 넘어 끝까지 쫓아가 기어코 지울 수 없는 흔적을 새겨버리고 마는 것이다.


아비: 도시의 아바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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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가 러닝셔츠 차림으로 거울을 보며 홀로 자비에 쿠거(Xavier Cugat)의 '마리아 엘레나(Maria Elena)'에 맞춰 맘보춤을 추는 씬은 홍콩 영화사를 통틀어 가장 매혹적인 명장면으로 꼽힌다. 하지만 아비가 곧 홍콩이라는 도시의 화신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 아름다운 춤은 지독하게 쓸쓸한 '고립된 나르시시즘'의 발현이다.


맘보는 본래 남녀가 짝을 지어 추는 라틴 댄스다. 그러나 아비는 철저히 혼자 춤을 춘다. 거울 속에 비친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며 스텝을 밟는 이 모습은, 영국(양어머니)과 중국(친어머니) 그 누구와도 진정한 파트너십을 맺지 못한 채 부유하는 홍콩의 지정학적 고독을 시각화한다.


이 춤은 겉보기엔 한없이 여유롭고 낭만적이지만, 그가 춤을 추는 공간은 결국 양어머니의 돈으로 마련된 좁은 방 안이다. 영국의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경제적 번영과 화려한 대중문화를 꽃피웠지만, 정작 뿌리를 내릴 땅(정체성)을 갖지 못한 홍콩의 처지가 바로 이 맘보춤이다. 방 안에서 아무리 우아하게 날갯짓을 해보아도, 그는 결국 땅에 발을 딛지 못하는 '발 없는 새'일뿐이다.


영화의 후반부, 아비가 친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직후 필리핀 뒷골목에서 위조 여권을 구하다 벌어지는 총격적은 너무나 갑작스럽다. 멜로드라마의 문법을 따라가던 영화가 돌연 삼류 액션극으로 돌변하는 이 기묘한 파열음은, 다분히 의도된 '장르적 메타포'로 읽어야 한다.


앞선 『중경삼림』 비평에서도 언급했듯, 홍콩인들에게 유한한 시간과 반환의 절박함이 만개한 도피처가 바로 '누아르'라는 장르였다. 아비(홍콩)는 자신의 근원(친어머니/중국)을 찾아갔으나 철저히 문전박대당한다. 돌아갈 곳도, 뿌리내릴 곳도 없다는 완벽한 절망과 정체성의 붕괴를 마주한 순간, 억눌려 있던 도시의 불안은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방식으로 폭발하고 만다.


이 뜬금없는 총격전은 서사의 구멍이 아니라, 식민지 홍콩이 처한 운명 자체가 그토록 부조리하고 폭력적이라는 메타적 선언이다. 결국 기차 안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아비의 마지막은, 화려했던 맘보춤의 시대를 끝내고 도래할 피비린내 나는 '홍콩 누아르' 시대로의 핏빛 예고편이자, 파국을 향해 달려가는 이별이 예정된 도시의 서글픈 초상이다.


결론: 시간을 가두는 예술, 그리고 1분의 마법

image.png 이 마법 같은 '1분'을 이야기하는 순간만큼은, 아비는 다름 아닌 왕가위 감독 자신의 완벽한 분신이다.


결론적으로 이 모든 엇갈림과 방황의 서사는, 결국 '시간을 가두는 예술로서의 영화'라는 왕가위 감독의 본질적 선언으로 귀결된다. 영화의 오프닝, 아비가 소려진에게 다가가 "1960년 4월 16일 오후 3시 1분 전, 우린 1분 동안 함께 했어"라고 속삭이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적어도 이 마법 같은 '1분'을 이야기하는 순간만큼은, 아비는 다름 아닌 왕가위 감독 자신의 완벽한 분신이다.


데뷔작인 『열혈남아(1988)』가 존재하긴 하지만, 왕가위의 영화 세계를 관통하는 미학적 메시지는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감독은 아비의 입을 빌려, 자신이 창조하는 영화라는 매체가 곧 '홍콩의 가장 찬란하고도 불안했던 시간을 스크린에 가두어 내일로 보내는 작업'임을 처음으로 선언한 것이다.


『중경삼림』이 통조림의 유통기한을 통해 유한한 시간의 절박함을 포착하고, 훗날 『화양연화』의 주모운이 앙코르와트의 벽 틈에 1960년대의 비밀과 화양연화를 영구히 박제했다면, 그 장대한 의식의 기원에는 바로 아비가 집착했던 이 '1분'이 자리하고 있다.


발 없는 새는 끝내 추락했고, 1960년대의 화양연화도 저물었으며, 불안에 떨던 홍콩의 시간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러나 왕가위 감독이 스크린이라는 우주 안에 단단히 가두어 둔 그 1분의 시간만큼은 영원성을 획득했다. 우리가 재생 버튼을 누를 때마다, 이별이 예정된 도시의 그 눈부신 찰나는 낡지 않는 마법처럼 끊임없이 우리의 오늘로 당도할 것이다.



image.png 『아비정전(阿飛正傳, Days of Being Wild, 1990)』


수,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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