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박하게 걸쇠가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차가운 문 덩어리가 틈을 내어준다. 꾸깃 꾸깃 몸을 집어넣으면 적막이 감도는 공간이 시작된다. "쾅" 둔탁한 소음과 함께 문이 닫히면 그 소음의 크기만큼 청아한 풍경의 울림이 한참을 머무르는 내 공간의 시작점.
" 다녀왔어. 별일 없었지? 여전히 포근하네. "
나의 공간에 인사를 건네며 신발을 벗는 동시에 가면을 내려놓는다.
나만 아는 나의 모습. 그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나의 모습. 진실된 나. 여기에서는 나를 꾸미거나 맞출 필요가 없다. 오랜 시간을 밖에서 보내고 들어올 때나 밖의 이야기를 끊지 못한 채 전화를 하며 여기에 들어서면 아직 가면을 벗지 못한 내가 제법 이질감이 들 때가 있다. 현관이라는 공간은 내 세상의 출입국 관리 사무소 같은 역할을 한다. 가급적 밖의 일은 이곳에서 끝내고 현관 너머의 세상에서는 온전한 나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이곳에 바깥의 나를 벗어둔다.
한껏 홀가분해진 몸을 이끌고 다음 발걸음을 옮기면 비로소 집이라는 공간, 나의 집이라는 세상을 느낄 수 있다. 원목의 가구와 주광색 전구가 포근함을 더하는 전형적인 가정집의 모습이지만, 이 세상의 가장 특별한 점은 나의 집이라는 것.
서른 전에 꼭 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완전한 독립. 취업을 통해 얻는 단순한 경제적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만 19세가 넘어 형식적으로 얻게 되는 성인으로서의 독립도 아닌 물리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진정한 독립을 이루고 싶었다.
철저하게 경제적인 논리로 접근한다면 독립이라는 것은 굉장히 사치스러운 일이 될 수도 있었다. 집에서 의식주를 해결한다는 것은 그만큼 소비를 줄일 수 있는 일이었고, 가사 노동이라는 무한의 굴레에 몸을 맡기지 않아도 된다는 큰 장점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독립을 하고자 했던 것은 남들과 다른 나였기 때문이었다.
어릴 때부터 한결같이 부모님께 들었던 말은 " 남들처럼만 살아라. 남들이 하면 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저 평범한 삶을 살아가길 원했던 부모님의 바람과는 달리 나에겐 지극히 평범하지 못한 하나가 있었다.
20대 초까지만 해도 나는 취업이라는 표면적 목표를 가지고 있었기에 경주마가 달리듯 고정된 시선으로 앞만 보고 달렸다. 군대를 다녀와 대학을 졸업하고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직장에 안착한 이후 나에게 작은 물음표 하나가 자라났다.
" 난 어떤 사람이지? "
둥글둥글한 성격을 가진 덕분에 어느 누구와 쉽게 어울릴 수 있었고, 원만한 교우생활을 지나 순조로운 면접 과정을 거쳐 좋은 직장에까지 쉽게 도달할 수 있었지만 그 모든 과정을 돌아보니 그 속에 나라는 사람은 없었다. 마치 지금까지 밟아온 시간들이 이 사회의 생산성에 기여하기 위한 AI를 제작한다면 이런 경험들이 주입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지독하게 평탄했고 징그럽게 완만한 상향 곡선이었다.
주위를 돌아보니 이제껏 간과하고 있던 것이 눈에 보였다. 난 어떤 음식을 좋아하고 무엇을 할 때 즐겁고 어떤 장소를 좋아하며 어떤 가치관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가. 그것은 음식에 대한 사랑이고, 시간에 대한 사랑이며, 공간에 대한 사랑이자, 세상에 대한 사랑의 다짐이었다.
이 것은 나에 대한 학습이자 사랑에 대한 원초적 접근이었다. 그렇게 매일의 일부분을 나를 알아가는 것에 할애했다. 생각보다 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장 큰 난제가 남아있었다.
" 난 어떤 사람을 좋아하지? 사랑하지? "
내가 쉽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사랑 중에서도 내 안의 사랑, 좀 더 구분되어 표현하자면 취향에 가까운 것들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닌 또 다른 객체인 상대방과의 관계 사이에서 형성되는 사랑이라는 것은 상상만으로는 참 낭만적이고 로맨스 영화의 한 장면이겠지만, 현실적으로 접근했을 때 전혀 그려지지 않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사랑의 방향을 내 안에서 밖으로 돌려보고자 주변의 많은 이야기를 청취하기 시작했다. 되지도 않는 연애 고민을 들어보기도 하고 괜한 술기운에 사랑은 무엇일까 토론의 장을 열어보기도 했다. 그들의 말에서 느껴졌던 공통점은 기분 좋은 떨림, 미치도록 내가 단순해지는 것, 그리고 그 사람과의 미래를 그려보는 것이었다.
아직 느껴보지 못한 그 감정들을 작게나마 느꼈던 순간이 언제였을까 떠올려 보다가 문득 내가 멋있다고 생각했고 닮고 싶었던 그 녀석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대학교 MT에서 우연히 친해졌던 그 녀석은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이 참 좋은 사람으로 바라봤다. 그 녀석은 서글서글하고 시원시원한 성격에 장난을 쳐도 아무도 기분 나빠하지 않을 선이라는 게 있는 녀석이었고, 한없이 가볍다가도 진지한 고민을 들어줄 때는 누구보다 진심으로 고민을 들어주던 녀석이었다. 외적으로도 참 인기가 많았다. 귀여운 소년의 얼굴이지만 축구를 좋아하고 남자답게 화끈한 모습들 덕분에 여자들의 관심이 끊이질 않았다.
먼발치에서 그 녀석이 신이 난 모습으로 활짝 웃을 때 왠지 모르게 내 기분이 좋아졌었던 것을 기억했다. 그 녀석이 유독 나에게 짓궂은 장난을 걸 때마다 싫은 내색을 했지만 속으로는 약간 떨고 있었다. 기분 좋게. 그 녀석이 장기 연애하던 여자친구와 헤어지고는 술기운에 내 자취방을 찾아와 술냄새를 풍기며 옆에서 잠을 청할 때 괴롭지 않았으면 했고, 잘 잤으면 했고, 포근히 안아주고 싶었다. 그러다 잠꼬대로 날 끌어안던 그 녀석을 떠올리다가 맘 속으로 외쳤다.
" 말도 안 돼. 그건 우정이야. 착각하지 마. "
물밀듯이 밀려오는 혼란스러운 감정이 나를 깊은 푸른색에 잠기게 만들었다. 첨벙첨벙 발버둥 치다 보니 더 짙은 푸른색이 눈앞을 뒤덮었고 꼬르륵 물에 잠기듯 갑자기 마음이 고요해졌다.
해보자. 평범하지 않은 그 사랑의 세상을 한번 알아보자. 그 세상이 나의 세상인지 경험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