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르륵. 슥슥"
중문을 열고 가지런히 놓인 연보라색 실내화에 발을 끼워 맞춘다. 요 며칠 집에 소홀했더니 발아래로 먼지가 밟히는 기분이 든다. 실내화 밑창에 무언가 붙은 건지, 이모님이라고 부르는 로봇청소기에게 너무 많은 휴식을 주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내일은 꼭 청소해야지' 지키지 못할 다짐을 한다. 전형적인 쓰리룸 구조의 국민 평형 콘크리트 구조물 아파트. 창 사이로 들어오는 짧은 빛들이 내 세상을 비춰준다. 세 개의 방은 내 머릿속 한 구석을 펼쳐둔 것처럼 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방과 방 사이를 이어주는 공간. 복도. 좁은 폭에 벽으로 둘러싸인 이곳에서 시선을 살짝 올리면 보이는 두 개의 액자. 집의 입구에 금색 그림을 두면 돈이 들어온다는 미신을 그냥 지나치지 못해 사랑했던 사람과 열심히 맞춘 1000피스짜리 해바라기 퍼즐. 그리고 그 옆에는 이름 모를 화가의 청량한 그림이 놓여 있다. 드넓은 초원의 어느 날을 담은 이 그림은 한눈에 나의 시선을 사로잡아 이 세상으로 납치되어 왔다. 언제나 푸르른 사람이고 싶은 내가 그림이라면 이 모습과 닮아있지 않을까. 연하고, 흐리고, 진하고, 짙고, 탁한 녹색 계열의 색상으로 표현된 초원을 바라보며 난 지금 어느 정도의 색일까 생각해 본다. 가장 연한 색이었던 때를 지나가는 어디쯤이길 바라기도 한다.
나의 색이 뒤엉켜 혼란스러웠던 그때. 처음으로 아는 사람 아무도 없는 낯선 곳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회사 사람들만 가득한 기숙사 건물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꽤나 지루한 일이었다. 동기들이 있긴 했지만 각자의 삶이 바쁜 탓에 시간 맞추기도 쉽지 않았고 어디서 그렇게 찾았는지 각자 애인과의 시간을 위해 쉬는 날을 모두 할애하고 있었다. 괜히 더 외롭고 공허한 기분이 밀려들었고 무모함과 호기심을 몸에 두른 채 그 세상이 궁금해졌다.
음지의 영역인 그 세상의 소식은 생각 외로 쉽게 찾을 수 있었고 그 세상 사람들이 드나드는 어플을 알게 되었다. 몇 번의 클릭만으로 핸드폰 바탕화면에 덩그러니 자리한 검은색과 빨간색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아이콘. 마치 낙인과도 같은 이 아이콘을 누르자 만 18세 이상 성인만 사용할 수 있다는 문구가 위협감을 더했다. 법 없이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을 종종 들었던 내가 금기의 영역의 입구를 마주하고 있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리고 누가 볼 새라 재빨리 아이콘을 길게 눌러 삭제하기를 실행했다. 이후 밀려오는 감정이 안도감인지 후회인지 알고 싶지 않아 괜스레 바쁘지도 않은 일상에 영양가 없는 약속들을 더해 생각의 우선순위를 뒤편 어딘가로 보내봤지만 결국 돌고 돌아 같은 자리에 같은 아이콘을 그려둔 채 앉아있는 나와 마주했다.
나쁜 짓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을 억누른 채 회원가입을 하고 GPS 사용 동의를 누르자 틀에 맞춰진 격자 속에 교묘하게 모자이크 처리된 얼굴 사진을 사용하는 사람들부터 어떤 사진도 설명도 없는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했다. 당시의 나는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가 중요하지 않았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숨겨진 세상에서 남 모르게 활동하고 있다는 생각에 뜻 모를 동질감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경계심이 밀려왔다. 그들에 대해 아는 정보라고는 나와 떨어진 거리, 진짜 이름도 아니고 고작 초성 몇 개 나열한 것 같은 가짜 이름에 진위를 알 수 없는 사진, 암호처럼 적혀있는 숫자들 뿐이었다. 잔뜩 긴장한 채로 찬찬히 그들의 정보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중성적인 느낌의 사람부터 이쪽 세상 사람이라고는 상상도 가지 않을 만큼 알파 메일까지 가득한 것을 보다 보니 경계심은 사라지고 흥미롭게 탐색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잠시 알아보려 온 것뿐이잖아. 깊게 빠져서 좋을 것 없어. 진정해.”
나의 맘을 달래며 핸드폰을 던져둔 채 침대에 몸을 맡겼다. 냉기가 도는 벽에 기대 열을 식히다 보니 스르륵 눈이 감겼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을까. 익숙하지 않은 짧은 알람 소리에 핸드폰을 들었다.
“안녕하세요. “ 인사였다. 나에게 인사할 사람이 누구지 떠올리다가 잠들기 전 설치했던 어플이 떠올랐다. 첫 소통이었다. 발신자의 프로필을 열어보았다.
까만 사진뿐인 프로필에 ”ㅇ“이라는 이름을 가졌고 24 180 70이라는 알 수 없는 숫자의 나열. 내가 알 수 있는 그의 전부였다.
“안녕하세요.” 초등학교 영어 시간에 암 파인 땡큐 앤유 하듯 답했다. 어떤 대답이 올까. 그리고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장 난 로봇처럼 삐걱대며 다음 답장을 기다렸다.
“어디 사세요?” 두 번째는 질문이었다. 대뜸 위치를 묻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사람의 프로필을 다시 열어 나와의 거리를 확인했다. 경기도 북부에 있는 나를 기준으로 대략 서울 어디쯤 살 것 같은 거리였다. 아무 정보도 없는 사람에게 굳이 내 위치를 알려줘도 되는 걸까. 생각하던 중 ”동갑이네요. 친구 할래요? “ 빠른 전개가 이어졌다. 차분하게 답장을 보냈다.
“ 네 좋아요. 근데 제가 처음이라서요.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서로 소개라도 할까요? 저는 경기도에 있는 24살 직장인입니다.”
“ 아 저도 24살이고 서울 살고 있어요. 학생이에요. 아예 처음이세요? “
처음이라는 말을 시작으로 대화가 이어졌다. 덕분에 많은 것들을 알 수 있었다. 암호처럼 보였던 숫자들은 사실 나이, 키, 몸무게의 조합이었던 것이고 성향이라는 것도 나눠져 있으며 만남의 목적도 제 각각 다르다는 정보를 얻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나도 모르게 궁금한 것들을 끝없이 쏟아냈고 친구는 ㅋㅋ과 ㅎㅎ를 섞어가며 나의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 이럴 거면 한번 만나자!” 훅 들어온 그의 제안에 짧게 고민하고 “그래! “라고 답했다. 여전히 경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왠지 모를 용기라는 게 샘솟았다.
- 이번 주 금요일 홍대 입구 -
그렇게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고 그저 몇 마디 대화만 나눠본 사이,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 사이인 그 친구와 약속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