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이 정해진 이후, 참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다.
가벼운 일상과 취미 이야기부터 정체성의 혼란을 처음 느꼈던 때가 언제인지와 같은 속 깊은 이야기들까지 나누다 보니 얼굴도 모르는 낯선 사람에게서 오랜 친구 같은 친근함을 느꼈다. 남몰래 어떤 사람일까 상상 속으로 그려보았다. 키 180에 몸무게 70의 이상적인 신체 조건, 풋살을 즐기고 친구들과 종종 피시방을 가는 평범한 대학생, 학교 과제 때문에 밤을 새우는 날이 잦지만, 짬날 때마다 생존신고를 해주는 다정함을 지닌 사람. 이 정보를 바탕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보니 그려지는 모습은 너무 완벽한 모습이었다. 웃을 때 이쁘고, 집중할 땐 멋있고, 장난칠 땐 귀여운 사람.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사람에게 콩깍지 따위가 씌워진 건가, 그저 동갑 친구로 만나는 것뿐인데 혼자 몇 발짝 먼저 나아간 것 같은 내가 부끄럽고 싫어서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약속 하루 전. " 뭐 해? "라는 메시지로 오늘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살짝 올라간 입꼬리를 그대로 둔 채 답장을 보냈다.
" 침대에 좀 누워있다가 출근 준비할 거야! 너는 뭐 해? "
괜히 이불을 끌어안고 몸을 배배 꼬게 되는 순간이었다.
" 난 오늘 약속 취소돼서 심심한데... 나랑 놀자. "
" 지금? 음.. 뭘 해야 재밌을까?"
"목소리 들려줘. "
순간의 정적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 정적을 깬 건 그의 전화 소리였다. 이 어플은 서로의 만남 창구로서 꽤 진심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통화 기능까지 탑재되어 있었다. 잔뜩 당황한 상태에서 얼떨결에 초록색 수화기 버튼을 눌렀다.
" 안녕."
중저음이지만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나에게 인사했다. 허둥지둥 목소리를 가다듬고 아무렇지 않은 척 인사했다.
" 안녕! "
" 너 목소리 좋다. "
" 처음 듣는 말인데? 놀리는 거지? "
" 난 거짓말 안 해. 목소리 좋아. 너. "
묵직한 톤으로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그의 말은 거짓말 탐지기 따위는 필요 없을 정도로 진실되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말에 괜한 의미 부여를 하게 되었다. 나에게 왜 이런 말을 하는지, 혹시라도 그가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나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는 상태인데 어떤 이유로 호감을 가지는 건지, 수상한 사람은 아닐까? 불쑥 좋은 곳에 같이 가자며 종교적 신념을 강요하려는 건 아닐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대화를 하는 바람에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뇌까지 넘어올 겨를이 없었다.
제법 대화가 익숙해질 때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자칫 지각할 것만 같은 시간이었다. 이제 출근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하며 대화를 마무리하려는 찰나
" 얘기 더 나누고 싶은데 아쉽다. 그래도 목소리 들으니까 내일 더 기대된다. 출근 준비 잘해. "
진실된 목소리와 말투에 담긴 아쉬움과 기대감의 단어가 이불을 한번 더 배배 꼬게 만들었다.
단순히 이쪽 세상이 궁금했던 내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친구가 생긴 것뿐인데 뜻하지 않는 감정 같은 게 생겨버린 것 같아서 얼떨떨한 설렘을 느끼고 있었다. 순간 이 감정을 부정하고 싶어졌다. 그냥 우정의 감정을 오해하는 것이라고, 처음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괜한 오해를 하고 있는 것뿐이라고, 그냥 말이 잘 통해서 느끼는 편안함을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이라고. 찬물 샤워를 하며 생각들을 날려 보내고 싶었지만 그날따라 물이 너무 차가웠다. 황급히 온수로 수도꼭지를 돌리고는 기분 좋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거울 속에 자연스럽게 웃음 짓는 나의 모습을 마주쳤고 따뜻한 습기가 거울을 덮어버렸다.
아직 회사에서 수습 기간을 지나고 있는 때였기에, 정신없이 업무 시간을 보내다 보니 퇴근 시간이었다. 정각에 맞춰 사원증을 찍고 회사 밖으로 나와서는 선배들과 휴일을 잘 보내라는 덕담을 잠시 나누고 기숙사로 발길을 재촉했다. 왠지 발걸음이 가벼웠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기분 좋은 고민들을 떠올렸다. 내일 어떤 옷을 입을지, 내일 어떤 머리를 해야 할지, 내일 만나면 어떻게 이야기할지. 답 없는 이 고민을 침대에 누워 눈을 감는 순간까지 쉬지 않고 되새김질했다. 그에게 잘 보이고 싶은 나의 마음이었다.
날이 밝고 나갈 채비를 했다. 오늘따라 머리가 지저분한 것 같고, 하필 이런 날에 콧등에 자리 잡은 뾰루지가 너무 싫었고, 맘에 드는 옷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확신을 가진 건 하나 없는 상태로 경의 중앙선 전철을 탑승했다.
덜컹 거리는 전철에서 이제 막 출발한다는 이야기를 그에게 보냈다. 바쁜 탓일까. 전철 밖의 풍경이 점점 도시화가 되어 가는 중이었지만 그의 답장은 오지 않았다. 괜한 불안감이 엄습하기도 했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홍대 입구까지 네 정거장 전. 여전히 그는 말이 없었다. 불안에 확신이 싹을 피우기 시작했다. " 뭐 해? " 짧게 다시 그에게 보냈지만 여전히 조용했다. 어쩌지 생각하다 보니 두 정거장 전. 점점 더 커지는 불안감을 억누르다 잠시 생각해 보니 우리의 약속 장소는 그저 홍대 입구역이라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정해진 게 없었다. 카페도 아니고, 식당도 아니고, 그냥 역. 아직 전철조차 너무 어려운 시골 촌뜨기인 내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변수였다.
이대로 집에 돌아가야 할까 고민할 때쯤 " 이번 정류장은 홍대 입구, 홍대 입구역입니다. "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마치 생각이 짧았던 나를 약 올리기라도 한 듯 발랄한 목소리가 얄미웠다. 어떡하지 고민하는 와중에 사람들의 물결에 전철 밖으로 떠밀려 나왔다. 생에 처음 오게 된 홍대 입구역에서 미아가 될 판이었다. 확신을 가지고 움직이는 사람들의 뒤에서 멀뚱멀뚱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뒷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출구라는 이정표를 따라 천천히 내 발걸음을 움직였다.
여전히 그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오늘따라 겨울바람이 차가웠고 몸을 잔뜩 웅크린 채 한 걸음 한걸음 움직이다 보니 어느새 개찰구에 도착했다. 이 개찰구를 지나 밖으로 나가면 난 무엇을 해야 하는가. 흐리멍덩한 눈에 잔뜩 힘 빠진 어깨로 교통카드를 찍었다. 수많은 출구 중에 어디로 나가야 할지 고개를 올려다보았다. 전철이 도착한 후 한참이 지나 나온 탓일까. 이미 사람들은 각자의 목적지로 떠나간 이후였고 나 혼자 덩그러니 서있는 상황에서 저 멀리 나와 비슷한 처지의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부동의 자세로 서 있는 한 사람. 까만 롱패딩에 진회색 비니를 쓰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가만히 서있는 그가 나와 다른 점이라고는 나와 반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
그가 움직였다. 개찰구 쪽으로 한 발짝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는 어디로 가려고 하는 것일까. 다가오는 그의 모습이 점점 선명해졌다. 뽀얀 피부에 강아지 같이 동그란 눈. 오뚝한 코.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입. 왜 미소를 짓고 있는 걸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생각보다 큰 키. 작은 얼굴 덕에 넓은 어깨와 긴 다리가 한껏 강조되는 듯했다. 그의 미소가 웃음이 되어 있었다. 하얀 건치를 보이며 웃었다. 양 볼에 작게 파인 보조개가 제법 귀엽다고 생각할 때쯤 그가 내 앞에 멈춰 섰다.
" 안녕? "
그가 내게 말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