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두 개의 질문 - 생각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제2장 동굴의 약속, 신의 탄생
5절. 신화의 힘, 그리고 그 그림자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가 오랜 시간 공동체의 입과 귀를 통해 다듬어지고 굳어져 마침내 신성한 권위를 얻게 된 것, 즉 신화. 이것은 인류가 발명한 최초이자 가장 강력하며, 가장 위험하기까지 한 무기였다. 불이 추위와 어둠이라는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우리의 연약한 육체를 지켜주었다면, 신화는 혼돈과 무의미함이라는 내면의 불안으로부터 우리의 흔들리는 정신을 지켜주었다. 그것은 차가운 우주 속에서 우리가 기댈 수 있는 따뜻하고 단단한 의미의 집이었다.
이 위대한 발명품, 즉 ‘공유된 신화’는 호모 사피엔스에게 다른 어떤 인간 종도 감히 넘볼 수 없었던 막강한 힘을 안겨주었다. 앞서 언급한 역사가 유발 하라리가 저서 <사피엔스>에서 설파했듯, 호모 사피엔스가 결국 지구의 유일한 승자가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비결은 더 큰 뇌나 더 강한 완력, 혹은 더 뛰어난 도구 제작 능력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이야기, 즉 ‘허구’를 집단적으로 믿고, 그 이야기를 중심으로 수백, 수천 명에 이르는, 심지어 서로 얼굴도 모르는 낯선 사람들이 놀랍도록 유연하고 효과적으로 협력할 수 있는 유일한 종이었기 때문이다.
사냥꾼이 숯으로 동굴 벽에 그려 넣은 ‘동굴의 약속’은 바로 이 능력의 원형이었다. 그것은 혈연으로 묶인 30여 명의 소규모 가족 집단을 넘어, 수백 명의 낯선 사람들이 “우리는 모두 조상님의 별 아래 하나다” 혹은 “위대한 매머드 정령의 자손이다”라는 공동의 믿음 아래 뭉쳐 거대한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이 능력은 단순히 숫자의 많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협력의 ‘질’을 바꾸었다. 위기가 닥쳤을 때, 공동의 신화는 리더에게 권위를 부여하고, 구성원들에게 역할을 분담하며, 미래에 대한 희망을 공유하게 함으로써 훨씬 더 복잡하고 정교한 대응을 가능하게 했다.
이 능력은 생존 경쟁의 판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우리의 친척이자 한때 유라시아 대륙의 주인이었던 네안데르탈인을 다시 생각해 보자. 그들은 우리보다 골격이 더 튼튼했고, 추위에 적응하는 능력도 뛰어났으며, 뇌 용량도 우리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약간 더 컸을 수 있다 . 그들 역시 정교한 석기를 사용했고, 불을 다루었으며, 병든 동료를 돌보고 죽은 자를 매장하는 풍습을 가졌다. 그들에게도 분명 1장의 사냥꾼이 눈보라 속에서 느꼈던 것과 같은, 가족 단위의 깊고 강렬한 ‘감응’은 있었을 것이다 .
하지만 그들의 협력은 기껏해야 서로 얼굴을 알고 개인적인 신뢰 관계를 맺고 있는 수십 명 단위의 소규모 집단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동굴 벽에는 사실적이고 아름다운 동물 그림은 남아있을지언정, 라스코나 쇼베와 같이 우리 호모 사피엔스가 남긴 동굴벽화에서 볼 수 있는 추상적인 기호나 ‘사회 계약’을 담은 복잡한 세계관의 설계도는 훨씬 제한적이었거나, 지속적·확장적 체계로 발전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에게는 수백 명의 낯선 이들을 하나로 묶어줄 강력하고 유연한 ‘이야기’가 부족했던 것이다.
상황이 닥쳤을 때, 이 차이는 결정적이었다. 혹독한 가뭄이 몇 년간 이어져 사냥감이 급격히 부족해졌다고 상상해 보자. 150명으로 이루어진 호모 사피엔스 부족은 공동의 신화(“위대한 강의 정령이 노하셨으니, 특별한 제물을 바치고 새로운 사냥터를 찾아 떠나자!”)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경험 많은 노인들의 지혜를 모으고, 젊은이들을 정찰조, 사냥조, 채집조로 효율적으로 역할을 분담하여 위기에 체계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반면, 50명씩 세 그룹으로 나뉘어 있던 네안데르탈인들은 서로를 잠재적인 경쟁자로 여기며 제한된 자원을 놓고 다투거나, 별다른 협력 없이 뿔뿔이 흩어져 각자도생의 길을 갔을 가능성이 높다. 새로운 영토를 두고 전쟁이 벌어졌을 때도 마찬가지다. 단일한 지휘 체계와 공동의 목표(“저들은 우리의 신성한 사냥터를 침범한 이교도다!”)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수백 명의 사피엔스 전사들은, 아마도 용맹함은 뛰어났겠지만 소규모 가족 단위로 흩어져 싸우는 네안데르탈인들을 전략적으로 압도했을 것이다.
결국 빙하기 이후 생존 경쟁의 승패를 가른 것은 근육의 힘이나 뇌의 크기 차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이야기’의 힘, 즉 공유된 ‘정당화’의 힘이었다. 더 매력적이고, 더 설득력 있으며, 더 많은 사람을 ‘우리’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강력한 이야기를 가진 종이 결국 살아남았다.
신화는 우리를 강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우리에게 흔들리지 않는 소속감을 주었다. 나는 더 이상 아프리카 초원을 떠도는 외로운 개인이 아니었다. 나는 ‘큰곰 부족’의 자랑스러운 일원이며, 나의 등 뒤에는 수백 명의 살아있는 동족과 수천 년 동안 우리를 지켜봐 온 위대한 조상신들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에게 고통스러운 삶의 의미를 부여했다. 나의 삶은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덧없고 허무한 과정이 아니었다. 나의 고된 사냥은 부족을 먹여 살리는 신성한 임무였고, 전쟁터에서의 나의 용맹한 죽음은 부족의 영광이자 조상님의 별자리로 돌아가는 영광스러운 귀환이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죽음이라는 가장 큰 공포마저도 이겨낼 용기를 주었다. 비록 나의 연약한 육신은 언젠가 썩어 한 줌 흙으로 돌아가겠지만, 나의 이야기는, 그리고 우리 부족의 위대한 이야기는 이 동굴 벽화와 함께, 그리고 후손들의 입을 통해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라는 불멸에 대한 믿음.
하지만 이 강력하고 위안을 주는 신화의 눈부신 빛 뒤에는, 우리가 앞으로 수만 년 동안, 아니 어쩌면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그 끔찍한 대가를 치르게 될 길고 어두운 그림자가 이미 드리워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이야기’가 세상의 유일한 진리이며, 따라서 ‘그들의 이야기’는 틀렸거나 열등하다는 위험하고 오만한 믿음이었다. ‘우리’를 그토록 강하게 하나로 묶어준 바로 그 신화가, 동시에 ‘우리’와 다른 신화를 가진 ‘그들(The Others)’을 의심하고, 경멸하며, 배척하는 견고하고 높은 장벽이 된 것이다.
‘조상님의 별’은 우리 부족에게는 거룩하고 자비로운 수호신이었지만, 강 건너편 숲 속에서 ‘위대한 뱀’을 숭배하며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부족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차가운 별 무리에 불과했다. 반대로, 그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뱀은 우리에게는 교활하고 위험한 악의 상징일 뿐이었다. 그들의 신은 거짓된 우상이었고, 그들의 낯선 의식은 이해할 수 없는 야만적인 미신이었다.
이 ‘우리’와 ‘그들’의 근본적인 구분은, 낯선 존재를 경계하고 두려워하도록 진화해 온 인류의 가장 깊은 본능과 결합하며 폭발적인 파괴력을 낳았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우리와 다른 존재, 우리와 다른 생각을 가진 존재를 잠재적인 위협으로 간주한다. 낯선 부족은 나의 한정된 사냥감을 빼앗아갈 경쟁자였고, 나의 가족과 동굴을 위협할지도 모르는 잠재적인 적이었다. 신화는 이 원초적인 공포와 적대감에 신성하고 절대적인 정당성을 부여했다.
“저 강 건너 뱀 부족 놈들은 우리의 신성한 사냥터를 침범하고 조상님들을 모독하는 야만인들이다! 그들을 몰아내고 그들의 땅을 차지하는 것은 위대한 조상님들의 뜻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직시해야 할 '감응의 첫 번째 배신'이다. 1장에서 사냥꾼이 눈보라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고통스러운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발휘했던 그 숭고하고 창조적인 ‘정당화’의 능력은 이제, 다른 인간 집단을 말살하는 행위마저 ‘정당화’하는 끔찍하고 파괴적인 논리로 변질되었다. 공동의 적을 설정하는 것은 내부의 불만을 잠재우고 결속을 다지는 가장 효과적이고 오래된 방법이었다. ‘북쪽의 영혼’이라는 상상 속의 괴물에 맞서 하나가 되었던 감동적인 경험은, 이제 ‘강 건너 뱀 부족’이라는 실재하는 적에 맞서 더욱 강력하고 잔인하게 발현되었다.
우리는 그들을 더 이상 우리와 같은 고통과 기쁨, 사랑과 슬픔을 느끼는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와 다른 신을 섬기고 다른 이야기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야만인’, ‘이방인’, 심지어 인간 이하의 ‘짐승’으로 격하되었다. 그들을 죽이는 것은 더 이상 살인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 부족의 생존과 우리 신의 영광을 위한 신성한 의무이자, 때로는 영웅적인 행위로 찬양받았다. 인류 최초의 전쟁, 집단 학살, 그리고 인종 청소는 그렇게, 신들의 이름 아래, 공유된 신화의 깃발 아래 시작되었다.
또한, 신화는 우리에게 삶의 의미와 안정감을 주는 대가로, 우리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 중 하나, 즉 ‘의심할 자유’를 서서히 빼앗아갔다. 사냥꾼이 동굴 벽에 새긴 ‘동굴의 약속’은 한번 공동체의 공식적인 진리로 받아들여진 이후, 절대적인 권위를 갖게 되었다. 만약 어떤 호기심 많고 비판적인 젊은이가 어느 날 밤하늘을 보다가 용기를 내어 “정말로 우리 할머니가 저 별이 되었을까요? 어쩌면 저것은 그냥 아주 멀리서 불타는 돌멩이가 아닐까요?”라고 묻는다면, 그는 부족의 근간을 흔드는 위험하고 불경한 이단아로 낙인찍혔을 것이다. 그는 공동체로부터 따돌림당하거나 추방되었을 것이고, 심한 경우 신들의 노여움을 샀다는 이유로 돌에 맞아 죽임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신화는 세상에 대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태어났지만, 역설적으로 더 이상의 근본적인 질문을 허락하지 않는 견고한 정신의 감옥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신화의 비극적인 역설이다. 그것은 한 개인이 겪은 가장 깊고 진실하며 고통스러운 ‘감응’의 체험에서 태어났지만, 시간이 흘러 권위 있는 제도로 굳어지면서 오히려 미래 세대의 새로운 ‘감응’과 질문을 억압하는 차가운 족쇄가 되었다. 상상해 보자. 1장의 사냥꾼에게서 몇 세대가 흐른 뒤, 그의 어느 후손 중 하나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조상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경이로움, 즉 패턴 너머의 수학적인 질서에 대한 예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그는 별이 조상님의 얼굴이 아니라, 어떤 보편적인 법칙에 따라 정확하게 움직이는 거대한 천상의 기계일지도 모른다고 어렴풋이 직감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족의 주술사와 장로들은 그의 새로운 ‘형성’, 즉 기존의 설명을 넘어서려는 그 위험한 지적 호기심을 공동체의 질서를 위협하는 불경한 생각으로 간주하고 그 싹을 가차 없이 잘라버렸을 것이다. “네가 감히 위대한 조상님들의 가르침과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우리 부족의 지혜를 의심하느냐!” 개인의 진실하고 예리한 경험과 직관은, 공동체의 굳어진 신화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무력했다.
세상을 이해하는 단단하고 안정적인 이야기. 이 강력하고 위안을 주는 신화의 세계관은 그러나 동시에 배제와 폭력, 그리고 질문의 억압이라는 치명적인 대가를 요구했다. ‘감응’은 그 자체로 완전한 답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를 하나로 묶었지만, 동시에 우리를 눈멀게 했다.
인류는 자신의 뜨거움에 스스로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이 맹목적인 감응의 폭주에 제동을 걸고, 자신과 세계를 한 걸음 떨어져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또 다른 종류의 눈, 즉 감정의 안개를 걷어내고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려는 차가운 시선을 절실히 필요로 하게 되었다. 집단의 뜨거운 함성 속에서 ‘나’를 잃어버리는 대신, 고독하지만 명료하게 ‘세계는 무엇인가?’라고 다시 묻는 용기. ‘우리 부족의 이야기’를 넘어,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근본적인 진리’는 없는지 탐색하려는 대담한 시도가 필요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그 질문을 피워내기까지, 인류는 또다시 수만 년의 지루하고 때로는 잔인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그 새로운 종류의 질문이 마침내 터져 나온 곳은 더 이상 어둡고 내밀하며, 단 하나의 이야기가 절대적인 권위로 지배하는 빙하기의 동굴이 아니었다. 그것은 온갖 종류의 이질적인 신들과 낯선 이야기들이 마치 시장의 상품처럼 뒤섞여 경쟁하고 거래되던, 눈부신 지중해의 햇살 아래의 시끄럽고 혼란스러우며 활기 넘치는 광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