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그리워하다
어린 시절의 장면과 냄새와 소리들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모든 감각을 깨우고 어땔 땐 미칠 듯한 그리움으로 나를 들뜨게 만든다. 가질 수 없는 것에 더 애착을 보이듯이 돌아갈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이기 때문에 더 그럴 수도 있겠다.
어린 시절의 장면 속에 나의 아버지가 있다.
그는 이른 새벽에 오솔길을 따라 이슬을 밟으며 밭으로 향하고 있다.
어느 날엔 저녁을 먹고 희미한 호롱불 아래에서 책을 읽고 있다.
때론 수백 명의 마을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봄날 하루는 힘겹게 밭을 간 후 새참으로 막걸리를 마시고 밭둑에서 낮잠을 자고 있다.
그리고 나를 향해 환하게 웃고 있다.
수하리에서 가장 가난한 집안의 아들이었던 나의 아버지는 결혼을 해서도 여전히 가난했으나 언제나 근면성실했다.
그로 인해 옥수수 서 말의 살림살이에서 점차 논밭이 한 조각씩 늘어나는 기적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마을에서 가장 똑똑했다.
똑똑하다는 것은 기록이나 수치로 알 수 없으나 사람들의 입을 통해 회자되었다.
그는 학교도 서당도 다녀본 바 없지만 본 것 들은 것 읽은 것을 다 기억할 만큼 비상했기에 스스로 문리를 깨치고 이치를 터득했다.
복잡한 사안을 명쾌하게 해결했으며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을 논리적으로 설득했다.
매일 신문을 읽고 독서를 하고 마을의 모든 문서를 그가 작성하였다.
그리고 자식들에겐 다른 삶을 주고 싶었다.
이 말은 누군가에겐 당연하게 들릴 수도 있다.
이제 자식들한테 공부를 시켜 다른 삶을 주는 게 당연한 시대가 도래하였지 않느냐고..
하지만 그곳은 여전히 벽지이자 오지였고 농사꾼의 자식은 농사꾼이 되는 게 순리라고 여길 만큼 동이 트지 않은 곳이었다.
그곳엔 아직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 석유등잔을 사용했고 외부인이라곤 사흘에 한번씩 오는 우체부가 전부였다. 아버지의 신문도 우체부가 배달해 주는 시스템이었다.
학령기가 지나서야 국민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들도 많았고 많은 부모들이 농사철엔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는 마을에서 가장 먼저 아침을 맞이한 것이다.
집에서 삼십 리 떨어진 상급학교에 아들을 진학시켜며 아버지는 아들에게 튼튼한 자전거를 사주었다.
그리고 해가 짧은 겨울엔 혼자서 돌아오는 아들이 무서울까 봐 어두워진 산길로 마중을 나갔다.
그는 더 열심히 일을 했고 그래서 더 고단했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우리가 어른이 되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산골의 가진 것 없던 한 농부가 다섯 명의 자식을 잘 키워보고자 했던 그 노력이 얼마나 말도 안 되게 대단한 것이었는지 말이다.
그 덕분에 우리 남매들은 도시에서 학교를 다녔고 도시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아버지의 꿈이 다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우리는 그 무엇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삶이 고단했듯이 우리들의 삶도 고단하고
도시가 주는 피로감은 자꾸만 귀향의 꿈을 꾸게 한다.
그 삶이 더 아름답고 풍요롭다는 마음속 인정이다.
그래서 조금은 불행을 느끼기도 한다.
나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늘 먹먹하다.
아버지는 아들 네 명을 낳고 딸인 내가 태어나자 세상을 다 얻은 듯이 기뻐서 온 마을을 돌아다니며 자랑을 했다고 한다.
나는 집에 있을 땐 응당 아버지의 무릎에 앉아서 생활을 했는데 그것은 열 살까지 이어졌다.
아버지는 나를 야단치거나 나무란 적이 없고 어떤 훈육을 하려 하지도 않았다.
사랑을 받는다는 건 너무나 축복인데 어릴 땐 그 소중함을 몰랐고 커서는 삶의 역경 앞에서 부질없는 추억으로 치부되어 버렸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아버지의 사랑 덕분에 나는 쓸쓸한 길을 혼자 걸을 때도 외롭지 않았고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
아버지가 떠난 지 삼십 년이 되었다.
아버지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