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프의 연애방정식-1

제1화. 낙하산이 떨어뜨린 칼날

by 지그프리드

○ 시놉시스: "칼 대신 서류를 든 셰프"

동생 연호가 입사 직전 거액의 사기를 당해 잠적하자, 연우는 동생의 빚을 갚고 그가 돌아올 자리를 만들기 위해 호텔 셰프 자리를 포기합니다.

남장을 하고 성운그룹 전략기획팀에 입사한 그녀.

하지만 하필 그녀의 상사인 태준은 매일 점심 메뉴의 염도까지 체크하는 까다로운 미식가입니다.

사고 친동생을 대신하기 위한 여주인공의 고군분투기입니다.


○ 등장인물

- 한연우(26세) : 촉망받던 천재 수 셰프(Sous Chef). 5성급 호텔 레스토랑에서 최연소 타이틀을 거머쥐기 직전이었으나, 사라진 남동생 연호의 사고를 수습하고 그의 커리어를 지키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사직서를 던집니다. 칼을 잡던 손으로 이제는 볼펜을 잡고 성운그룹 신입사원으로 잠입합니다- - 강태준(32세) : 성운그룹 본부장이자, 미식가들 사이에서 '악마의 혀'라 불리는 완벽주의자. 정체를 숨긴 재벌 3세로, 스트레스를 요리로 푸는 비밀스러운 취미가 있습니다.

- 한연오(26세) : 한연우의 쌍둥이 남동생, 어릴 때부터 사고를 치고 다닌 사고뭉치입니다.



제1화. 낙하산이 떨어뜨린 칼날


5성급 호텔 레스토랑의 주방은 전쟁터다. 그리고 연우는 그 전장의 가장 날카로운 창이었다.

최연소 수 셰프(Sous Chef)라는 타이틀은 거저 얻은 것이 아니었다.

매일 새벽 수산시장을 누비고, 하루 16시간씩 불 앞에서 씨름하며, 칼에 베이고 데인 흉터가 훈장처럼 박힌 손으로 일궈낸 결과였다.

하지만 그 모든 노력이 거품처럼 사라진 것은, 동생 연호의 다급한 목화 한 통 때문이었다.


"누나, 나... 죽을 것 같아. 사기를 당했어. 회사도... 못 갈 것 같아."


연호는 꿈에 그리던 국내 최대 기업 '성운그룹'의 신입사원 연수 등록을 앞두고 거액의 사기를 당해 잠적해 버렸다.

동생이 돌아올 때까지, 아니, 동생이 벌여놓은 사태를 수습할 때까지 연우가 할 수 있는 선택은 하나뿐이었다.

호텔 총주방장의 만류를 뒤로하고, 연우는 자신의 모든 열정이 담긴 요리 셰프 자리에 사직서를 던졌다.

그리고 동생 연호의 이름으로 압박붕대를 감고, 머리를 쇼트커트로 치고, 투박한 정장을 입었다.


어릴 때부터 크고 작은 사고를 연오가 치면, 수습은 항상 누나인 연우였다.

1분 먼저 태어났다고 누나라니...

이런 불공평한 상황이 늘 불만이었다.

하지만, 동생 연오가 직장을 잃게 되면 슬퍼하실 부모님 생각에,

어쩔 수 없이 동생의 사고를 수습하기로 했다. 눈물을 머금고....

동생이라는 부모님의 낙하산(?)에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랄까....

어쨌든... 사고 수습은 누나인 내가 해줘야 할 것 같았다. 늘 그러듯이.....


"셰프가 아니라, 신입사원 한연호로 살아남는 거다. 딱 동생이 돌아올 때까지만."


성운그룹 전략기획팀. 연우가 배치된 곳은 '지옥의 1팀'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그곳의 수장은 강태준 본부장.


성운그룹 전략기획팀의 아침은 숨 막히는 침묵과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로 시작됐다.

연우에게 이 소음은 주방의 도마 소리보다 훨씬 더 위협적이었다.


"한연호 씨, 어제 부탁한 주간 보고서 데이터 정리 다 됐나?"


박 대리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연우가 움찔하며 모니터를 쳐다봤다.

화면 속에는 정체 모를 숫자와 영어 가득한 엑셀 시트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양파 100개 까는 게 차라리 쉽지...'


연우는 독수리 타법으로 조심스럽게 자판을 눌렀다.

셰프 시절, 예리한 칼날로 식재료를 0.1mm 단위로 썰어내던 그 섬세한 손가락은 마우스만 잡으면 덜덜 떨렸다.


"아...!"


실수로 시트 전체를 삭제해 버린 연우가 비명을 삼켰다.

그때, 팀 전체에 갑자기 찬바람이 쌩 불었다. 복도 끝에서부터 발소리가 들려왔다.

전략기획본부장 강태준의 출근이었다.

직원들이 일제히 일어나 고개를 숙였고, 연우도 엉거주춤 따라 일어났다.

태준은 눈길조차 주지 않고 팀장석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의 예민한 코끝에 낯선 향기가 걸렸다.


진한 커피 향과 종이 냄새 가득한 사무실에서, 단 한 곳. 신입사원 한연호의 자리에서만 아주 미세한 '시나몬과 파슬리' 향이 났다.

연우가 출근 전 버릇처럼 손을 씻고 바른 셰프용 핸드밤 냄새였다. 태준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지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사무실 적응보다 더 힘든 건 '점심 메뉴 정하기'였다.


"신입, 오늘 점심 뭐 먹을까? 너무 비싸지 않으면서 메뉴 빨리 나오는 곳으로 골라봐."


박 대리의 미션에 연우는 근처 식당 리스트를 뒤졌다. 하지만 셰프의 본능이 방해를 시작했다.


'이 집은 냉동육을 쓰네. 여긴 조미료가 너무 과하고... 아, 여긴 위생 등급이 별로인데.'


결국 연우가 고심 끝에 고른 곳은 회사 뒷골목의 허름한 국밥집이었다. 팀원들은 투덜대며 따라갔지만, 음식을 한 입 먹는 순간 조용해졌다.


"어? 여기 국물이 왜 이렇게 진해? 원래 이런 맛 아니었는데?"


연우는 속으로 생각했다.


'당연하죠. 제가 주방장님께 생강이랑 청주 좀 더 넣으라고 팁을 드렸거든요.'


연우는 팀원들의 숟가락 속도와 표정을 살피며 간이 맞는지, 온도는 적당한지 체크하고 있었다.

습관적인 '테이스팅' 눈빛이었다. 그때, 식당 구석에서 혼자 식사를 하던 남자가 연우의 눈에 들어왔다.

남방에 캡 모자를 깊게 눌러쓴 남자.

그는 국밥을 한 술 뜨더니 인상을 팍 쓰며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연우는 그 남자가 누군지도 모르고 본능적으로 다가갔다.


"저기, 혹시 간이 안 맞으시나요? 소금보다는 새우젓을 반 스푼만 더 넣으시면 육향이 확 살아날 텐데."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모자 아래로 드러난 날카로운 눈매와 오뚝한 콧날. 강태준 본부장이었다.

그는 남의눈을 피해 단골 식당에서 혼자 점심을 해결하려던 참이었다.


"자네... 전략기획팀 신입 아닌가?"

"어... 아! 본부장님!"


연우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태준은 무심하게 제 앞의 국밥과 연우를 번갈아 보았다.


"새우젓 반 스푼?"


태준은 반신반의하며 새우젓을 넣고 국물을 맛보았다. 순간, 태준의 눈이 커졌다. 텁텁했던 국물 맛이 거짓말처럼 깔끔해졌다.


"한연호라고 했나? 자네, 통계 정리 실력은 형편없던데... 미각은 통계보다 정확하군."


태준의 차가운 칭찬(?)에 연우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이것이 연우가 '사무실의 유령'에서 '본부장의 요주의 인물'로 등극하게 된 첫 번째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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