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탕비실의 연금술사
○ 시놉시스: "칼 대신 서류를 든 셰프"
동생 연호가 입사 직전 거액의 사기를 당해 잠적하자, 연우는 동생의 빚을 갚고 그가 돌아올 자리를 만들기 위해 호텔 셰프 자리를 포기합니다.
남장을 하고 성운그룹 전략기획팀에 입사한 그녀.
하지만 하필 그녀의 상사인 태준은 매일 점심 메뉴의 염도까지 체크하는 까다로운 미식가입니다.
사고 친동생을 대신하기 위한 여주인공의 고군분투기입니다.
○ 등장인물
- 한연우(26세) : 촉망받던 천재 수 셰프(Sous Chef). 5성급 호텔 레스토랑에서 최연소 타이틀을 거머쥐기 직전이었으나, 사라진 남동생 연호의 사고를 수습하고 그의 커리어를 지키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사직서를 던집니다. 칼을 잡던 손으로 이제는 볼펜을 잡고 성운그룹 신입사원으로 잠입합니다- - 강태준(32세) : 성운그룹 본부장이자, 미식가들 사이에서 '악마의 혀'라 불리는 완벽주의자. 정체를 숨긴 재벌 3세로, 스트레스를 요리로 푸는 비밀스러운 취미가 있습니다.
- 한연오(26세) : 한연우의 쌍둥이 남동생, 어릴 때부터 사고를 치고 다닌 사고뭉치입니다.
제2화. 탕비실의 연금술사
태준은 성운그룹 내에서도 유명한 '카페인 중독자'이자 '커피 빌런'이었다.
그의 비서실에는 수백만 원짜리 에스프레소 머신이 있었지만, 태준은 늘 만족하지 못했다.
원두의 산도, 추출 시간, 심지어 물의 온도까지 따지는 그에게 커피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연료'이자 '예술'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오후, 회의를 앞두고 예민해진 태준이 직접 탕비실로 향했다.
비서가 타온 커피가 마음에 들지 않아 직접 내려 마실 생각이었다.
탕비실 문을 열자, 그곳엔 신입사원 연우가 있었다.
연우는 팀원들의 심부름으로 종이컵 여러 개를 늘어놓고 커피를 타고 있었다.
"본부장님!"
태준이 나타나자 연우는 고무장갑을 벗듯 급하게 손을 정리했다.
태준은 무심하게 연우를 지나쳐 머신 앞으로 갔지만, 이내 코끝을 간지럽히는 '완벽한 향기'에 멈춰 섰다.
사무실의 흔한 믹스커피 냄새가 아니었다.
고소하면서도 끝맛이 은은하게 달콤한, 갓 볶은 원두에서나 날 법한 깊은 향이었다.
태준의 시선이 연우의 종이컵으로 향했다.
"그 커피, 자네가 탄 건가?"
"아... 네. 대리님들이 잠 깨는 커피 좀 타오라고 하셔서요."
태준은 연우가 들고 있는 컵을 뺏다시피 가져가 한 모금 머금었다.
순간, 태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건... 믹스커피가 아니군. 베이스는 믹스인데, 산미가 살아있고 뒷맛이 깨끗해. 뭘 넣었지?"
연우는 당황하며 뒷걸음질 쳤다. 사실 대단한 기술은 아니었다.
셰프 시절 소스의 밸런스를 잡던 버릇이 나왔을 뿐이었다.
"그게... 별건 아니고요. 종이컵을 미리 뜨거운 물로 데워서 온도를 맞췄고, 설탕과 프림의 비율을 조금 조절한 다음에... 마지막에 시나몬 파우더 아주 조금이랑 소금 한 꼬집을 넣었습니다. 소금이 단맛을 더 끌어올려 주거든요."
태준은 컵을 내려다보았다. 믹스커피 한 잔을 타면서도 온도를 체크하고 '단짠'의 조화까지 계산하다니.
"소금 한 꼬집이라... 요리라도 하는 사람처럼 말하는군."
태준의 날카로운 시선이 연우의 얼굴에 머물렀다.
가까이서 보니 연우의 눈은 지나치게 맑고, 슈트 깃 사이로 보이는 목선은 남자라기엔 너무 매끄러웠다.
연우는 태준의 시선이 느껴지자 마른침을 삼키며 목소리를 굵게 냈다.
"어머니께서 식당을 하셔서 귀동냥으로 배운 겁니다! 하하, 별거 아닙니다 본부장님!"
"별거 아니라고 하기엔 내 입이 너무 즐겁군. 한연호 씨."
태준은 들고 있던 비싼 텀블러를 연우에게 내밀었다.
"내 것도 한 잔 부탁하지. 설탕은 빼고, 온도는 85도. 소금 한 꼬집의 비율은 자네 감각에 맡기지. 5분 뒤에 내 방으로 가져와."
태준이 나가자 연우는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 뒤로 전략기획팀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본부장님이 신입사원이 탄 커피만 마신다'는 소문이었다.
성운그룹 전략기획본부장실의 문은 평소 철성 같았다.
하지만 매일 오후 3시만 되면, 그 철문 너머로 신입사원 한연우(연호)가 당당하게, 혹은 조심스럽게 입성했다.
"본부장님, 요청하신 커피 가져왔습니다."
태준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턱짓으로 앞의 소파 테이블을 가리켰다.
연우는 익숙하게 쟁반을 내려놓았다. 오늘의 커피는 단순한 커피가 아니었다.
탕비실에 굴러다니던 말린 귤껍질을 깨끗이 씻어 설탕에 절인 뒤, 에스프레소 위에 살짝 올린 '오렌지 비앙코' 스타일의 커피였다.
태준이 컵을 들자 상큼한 시트러스 향이 본부장실의 딱딱한 공기를 단번에 환기시켰다.
"오늘도 독특하군. 탕비실에 이런 재료가 있었나?"
"팀장님 서랍에 있던 굴러다니던 귤을 좀... '협찬' 받았습니다. 본부장님 오늘 회의가 연달아 있으셔서 집중력이 떨어지실 것 같아서요."
태준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만족스러운 듯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평소라면 상상도 못 할 행동을 했다.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친 것이다.
"앉아. 마시는 동안 브리핑 좀 듣지."
연우는 당황하며 엉거주춤 소파 끝에 걸터앉았다.
태준은 업무 이야기를 꺼내는 듯했지만, 사실 그의 관심은 딴 곳에 있었다.
가까이서 본 연우의 셔츠 깃 너머로 하얀 목덜미가 보였다.
남자치고는 너무 고운 선, 그리고 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드는 로즈메리 향기.
"한연호 씨는... 왜 셰프가 안 됐지? 이 정도 감각이면 주방에 있는 게 더 어울릴 텐데."
태준의 돌직구에 연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 그게, 요리는 그냥 취미일 뿐입니다. 저는 성운그룹의 혁신적인 기획력에 매료되어..."
"거짓말."
태준이 갑자기 상체를 연우 쪽으로 훅 숙였다.
두 사람의 거리가 한 뼘도 채 되지 않을 만큼 가까워졌다.
태준의 깊고 검은 눈동자가 연우의 눈을 꿰뚫는 것 같았다.
"아까 탕비실에서 커피를 내릴 때도, 지금 내 반응을 살필 때도. 자네는 기
획서의 숫자보다 사람의 혀끝을 움직이는 데 더 재능이 있어."
태준의 손이 연우의 어깨에 머물던 머리카락을 살짝 털어냈다.
짧게 자른 머리칼 끝이 태준의 손가락에 닿았다. 연우는 숨을 멈췄다.
태준의 시선이 연우의 입술에 잠시 머물렀다 떠났다.
"앞으로 이 서비스, 계속해. 대신 조건이 있어."
"조... 조건요?"
"다른 녀석들한테는 타주지 마. 이 맛은 나만 아는 걸로 하지. 이건 '본부장 특권'이야."
태준의 목소리는 낮고 매혹적이었다. 연우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본부장실을 나오는 연우의 얼굴은 이미 잘 익은 토마토처럼 붉어져 있었다.
반면, 방 안에 남은 태준은 식어가는 커피 잔을 만지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왜 이렇게 이 조그만 신입사원에게 집착하는지 스스로도 정의 내리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