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는 게 아니라 비워야 한다.
회사에서 해주는 복지 중 건강검진이 있다.
40세 이상은 매년 해준다.
그나마 2분기가 한가해서 매번 이맘때쯤
건강검진을 신청한다.
이번에는 큰 마음을 먹고 장내시경을 신청했다.
장내시경은 검사보다 준비가 더 힘들다.
3일 전부터 카스텔라 베이글 두부 달걀 스팸 등
돌아가면서 지루하지 않게 먹었다.
김치찌개, 된장찌개, 모두 참았다.
전날에는 4시 전 흰 죽만 먹으라고 한다.
그것도 버틸만하다.
마지막 관문이 문제이다.
장정결을 위한 약.
4통을 마셔야 한다고 했다.
이번이 두 번째였지만 난
맛은 괜찮은 듯하다.
문제는 양이다.
물이 아니라
벌을 받는 기분이다.
살면서 쓴 물만큼 마셔야 하는 지옥이 있다고 했던가.
거의 체험판이다.
500ml 4통에 생수도 1L 이상을 마셔야 했다.
너무 긴장한 탓일까.
첫 통을 마시다가 결국 토했다.
먹은 것은 흰 죽밖에 없었고 고작
500ml 마셨을 뿐인데
위가 꽉 찬 느낌.
더 이상 내려가지 않는 느낌.
집안에서 제자리 뛰기를 하고
걷기를 시도했지만
올라오는 구역질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런데 웃긴 건
토하고 난 후
장에서부터 시작된 폭포수를 한 번 내려보내니까
다시 마실 수 있었다.
결국은 버티는 문제가 아니라
흘려보내는 문제였다.
위에서 장으로 장에서 밖으로 한 번 길이 열리니
그다음부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쉽게 마셨다.
회사도 비슷하단 생각이 들었다.
쌓아두고 버티려고 하면
어느 순간 토해낸다.
회사에서 쌓이는 것들이 있다.
부당하다 싶은 말 한마디,
억울한데 참은 상황,
말하지 못하고 삼킨 감정들.
그걸 계속 버티면서 쌓아두면
어느 날 나도 모르게 터진다.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사람에게.
일도
감정도
사람도
계속 넣기만 하면 어딘가에서 터진다.
회사생활하면서 우리가 오해하는 것 중 하나는
참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이 회사를 떠날 것이 아니라면
혹은 이 리더 밑에서 일해야만 한다면
참는 것이 맞다고 단정 짓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을 때가 많다.
참거나, 사표 쓸 각오로 말하거나
우리는 두 가지만 있다고 생각하는데
적당히 말하고 적당히 풀면서
소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버티는 힘이 아니라
흘려보내는 힘이다.
꽉 막힌 위장에서 머물게 할 것이 아니라
버릴 것은 버리고
흘려버릴 것은 흘려버려야 한다.
지금 나는
맑은 물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다.
몸이 비워지면 검사를 시작할 수 있듯
어쩌면 사람도
조금은 비워져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