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 길은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하얀 눈 위에는 결국 한 사람의 발자국만이 또렷해진다. 그러나 그 길은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겨울의 끝자락에서 내린 눈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불러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 위에 남은 나의 발자국은 외로움이 아니라 시간의 흔적이었다. 동요 한 구절과 함께 떠오른 그 시절의 놀이와 웃음은, 지금의 나에게 다시 걸어갈 용기를 건넨다.
어제는 겨울이 떠나기 아쉬웠는지 눈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포근한 기온 덕에 도로 위의 눈은 대부분 녹아내렸지만, 도로변과 골목길에는 아직 하얀 잔설이 남아 있었다. 그 위를 천천히 걸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은 유난히 고요했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매끈하던 하얀 길 위에 내 발자국만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 순간,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스쳤다. 세상에 나 혼자 남은 듯한 외로움. 동시에, 분명히 내가 지나왔다는 증거가 남아 있다는 묘한 안도감. 그때 오래된 동요 하나가 떠올랐다.
“하얀 눈위의 구두발자욱, 바둑이와 같이 간 구두발자욱, 누가누가 새벽길을 떠나가나, 외로운 산길을 구두발자욱.”
어린 시절, 이 노래를 부르며 고무줄놀이를 했다. 땅바닥에 선을 그어놓고, 선을 밟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친구들의 웃음소리, 숨이 차오르던 오후의 햇살, 넘어질 듯 말 듯 균형을 잡던 작은 발. 그때 우리는 세상의 전부가 그 운동장 안에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 노래 속의 바둑이는 늘 상상 속에만 있었다. 실제로 그 새벽길을 함께 걷는 개는 없었다. 우리는 외로운 산길을 걷는 발자국을 노래하면서도, 정작 친구들 틈에 섞여 웃고 떠들었다. 외로움을 흉내 내며 놀았지만, 사실은 조금도 외롭지 않았던 시간이었다.
어제 눈길 위에 남은 내 발자국을 바라보며 깨달았다. 지금의 나는 그때와는 다르게 정말 혼자 걷는 시간이 많아졌다는 것. 친구들과 한 덩어리로 움직이던 시절은 지나갔고, 각자의 삶은 각자의 방향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때의 기억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눈처럼 잠시 덮여 있을 뿐이었다. 발로 밟는 순간, 다시 또렷해졌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을 걷는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첫 발자국을 남기는 사람은 늘 망설인다. 혹시 길이 끊겨 있지는 않을지, 혼자 남지는 않을지 걱정한다. 하지만 누군가는 시작해야 한다. 누군가는 첫 발을 내디뎌야 한다. 그래야 길이 생긴다.
어린 시절 우리는 선을 밟지 않으려고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지금의 나는 인생의 선을 넘지 않으려고 조심하며 걷는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는 넘어질까 봐 겁을 내기보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법을 안다는 것이다.
‘바둑이는 없었다’는 사실은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른다. 결국 그 산길을 걷는 것은 나 자신이었으니까. 누군가가 끌어주기를 기다리기보다, 스스로 방향을 정하고 걸어야 하는 길이었다.
눈은 언젠가 녹는다. 발자국도 사라진다. 그러나 한 번 걸어본 길은 몸이 기억한다. 다음번 눈길에서는 덜 망설이게 된다. 삶도 마찬가지다. 한 번 건넌 외로움은 두 번째에는 용기가 된다.
어제의 눈길 위에 남은 발자국은 외로움의 증거가 아니라, 내가 여전히 걷고 있다는 증명이었다. 어린 시절의 웃음과 동요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조용히 나를 밀어주고 있었다.
바둑이가 없어도 괜찮다. 함께 걷는 존재가 보이지 않아도 괜찮다. 우리는 이미 수없이 많은 눈길을 건너온 사람들이다. 하얀 눈 위에 또 한 번 발을 내딛는 순간, 그 자리에 길이 생긴다. 그리고 그 길은 언젠가 누군가에게 작은 용기가 된다. 오늘의 발자국이 내일의 길이 된다. 그러니 주저하지 말자. 눈은 녹아도, 우리는 멈추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