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름때 묻은 손으로 쥔 펜
"40대 중반의 이른 퇴직, 낯선 가전 설치 현장에서 진땀을 흘리던 초보 기사가 50대 중반의 신인 작가가 되기까지."
이 글은 조직의 명함을 내려놓고 생존의 현장에 뛰어들었던 한 남자의 처절하고도 아름다운 기록입니다. 무거운 정수기를 짊어지고 계단을 오르내리며, 기름때 묻은 손으로 틈틈이 문장을 길어 올렸습니다.
실수가 두려워 화장실로 숨어 선배에게 전화를 걸던 고단한 일상은, 어느덧 수필이라는 그릇에 담겨 인생의 빛나는 훈장이 되었습니다. '가전 설치'라는 노동의 현장에서 '작가 등단'이라는 꿈의 현장으로 건너온 저의 이야기가, 인생의 2막 앞에서 망설이는 모든 분에게 매일이 설레는 새로운 설치 매뉴얼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백지가 되어버린 전문가의 시간
2주간의 교육은 달콤한 최면이었다. 매뉴얼대로만 하면 모든 가전이 마법처럼 제 자리를 잡을 줄 알았다. 40대 중반, 등 떠밀리듯 나온 조직 밖의 세상에서 나는 무모한 자신감 하나로 무장한 채 첫 현장에 섰다. 하지만 실전은 냉혹했다.
고객의 거실 한복판에 덩그러니 놓인 정수기 앞에서, 내 머릿속은 기계 내부보다 더 복잡하게 엉켜버렸다. 교육장에서 수십 번 반복했던 연결 순서는 온데간데없고, 눈앞은 그저 하얀 백짓장이 되었다. 등에선 식은땀이 줄기처럼 흘러내렸다.
화장실로 숨어든 초보 기사의 고백
고객의 시선이 뒤통수에 꽂혔다. 굳이 말을 섞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베테랑의 능숙함과 초보의 머뭇거림은 공기부터 다르니까.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비겁한 핑계를 대고 주차장으로 도망치듯 내려왔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선배 기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님, 이거 배수 호스가 생각이 안 납니다. 어떻게 하죠?"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내 처지가 처량했다. 한때 조직에서 수십 명의 부하 직원을 거느리며 호령하던 '나'는 없었다. 그저 당장 정수기 한 대를 제대로 설치하지 못해 쩔쩔매는 무력한 중년 사내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인생의 새로운 장을 설치한다는 건,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수평'을 잡는 일이라는 것을.
기름때 묻은 손으로 쥔 펜
그렇게 진땀을 흘리며 버텨온 10년의 세월. 가전을 설치하며 나는 기계만 연결한 게 아니라, 사람들의 삶을 엿보고 내 내면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고된 노동 후 녹초가 되어 돌아온 밤, 나를 치유한 건 소주 한 잔이 아니라 책장 사이의 문장들이었다.
남들은 은퇴를 준비할 50대 중반, 나는 가전 설치 기사의 투박한 손으로 공모전 원고를 썼다. 화장실로 도망치던 그 비겁했던 초보 시절의 기억조차 이제는 귀한 수필의 재료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창작산맥 신인상'이라는 이름으로 내 인생의 아름다운 가전을 내 마음속에 설치하게 되었다.
수평계를 내려놓고, 비로소 숨을 쉬다
가전 설치 기사로 산 지 어느덧 10년. 이제는 눈을 감고도 급수관의 각도를 맞추고, 고객의 표정만 봐도 무엇이 불편한지 읽어내는 베테랑이 되었다. 화장실 핑계를 대며 주차장에서 선배에게 전화를 걸던 그 겁 많은 초보 기사는 이제 없다. 하지만 전문가는 숙련된 기술만큼이나 무거운 책임감을 짊어지는 법이다.
그날도 그랬다. 녹초가 되어 퇴근한 저녁, 몸에 밴 기름때를 씻어내기도 전에 울린 낯선 번호의 전화 한 통. 내 가슴은 설렘이 아니라 덜컥 내려앉는 불안으로 먼저 반응했다. '혹시 오늘 설치한 집에서 문제가 생겼나? 내가 무엇을 놓쳤지?' 미소기 가신 굳은 얼굴로, 나는 마치 죄인처럼 조심스레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창작산맥 주간 000입니다. 이번에 투고하신 수필이 너무 좋아서, 저희 신인상에 천거해 드리려고 전화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작가님!“
순간, 방금까지 나를 짓누르던 퇴근길의 피로와 클레임에 대한 공포가 진공 상태처럼 사라졌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숨을 쉬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정중한 당선 축하 인사가 이어졌지만, 나는 혹여나 내 떨리는 목소리가 이 꿈같은 현실을 깨뜨릴까 봐 숨을 죽인 채 "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만 차근차근 되풀이했다. 내 생애 처음으로 얌전하고도 치열한 통화였다.
전화를 끊고 나서야 멈췄던 숨이 터져 나왔다. 세상을 다 가진 기분, 아니 어쩌면 세상을 새로 얻은 기분이었다. 가족들이 돌아오지 않아 적막한 거실, 나는 층간소음이 걱정되어 소리 내어 울지도, 웃지도 못한 채 혼자 방방 뛰며 무언의 환호성을 질러댔다. 40대의 은퇴와 50대의 고된 노동, 그 긴 터널을 지나온 나에게 인생이 건네는 뜨거운 악수였다.
나는 이제 가전만 설치하는 사람이 아니다. 누군가의 거실에 온기를 설치하듯, 누군가의 마음속에 희망의 문장을 설치하는 작가가 되었다. 내 인생의 수평계는 이제야 비로소 가장 완벽한 중심을 가리키고 있다.
#희망 #공모전 #감성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