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부팅의 시간, 그리고 마지막에 도착한 희망

끝이라 믿은 자리에서 시작이 피어나다

by 얼웨즈 Always
“끝났다고 생각한 자리에서,
뜻밖의 눈이 내렸다.”


새벽, 끝내 켜지지 않는 노트북 앞에서 나는 집착과 내려놓음 사이를 오갔다. 그날은 딸의 졸업식이었고, 흐린 하늘 끝에 뒤늦은 눈이 내렸다. 멈춘 기계와 쏟아진 눈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라는 신호였다. 결국 삶은 다시 부팅되고, 희망은 가장 늦은 순간에 도착한다.





새벽 네 시, 거무튀튀한 하늘 아래에서 나는 끝내 켜지지 않는 노트북과 씨름하고 있었다. 전원 버튼을 누르면 잠깐 숨을 쉬는 듯하다가 이내 조용히 꺼져버렸다. 어르고 달래고 협박까지 해봤지만 화면은 끝내 침묵했다. 그 안에는 새벽마다 붙잡고 썼던 문장들과 지우지 못한 초고들이 들어 있었다. 쉽게 포기하지 못한 이유였다.


마음속에서는 천사와 악마가 실랑이를 벌였다. 천사는 “데이터만 복구하면 된다, 기계는 소모품이고 이야기는 다시 쓰면 된다”고 말했고, 악마는 “조금만 더 시도해보자, 기적 같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부추겼다.


그 팽팽함을 끊어준 건 각시님의 한마디였다. “못 고치더라도 데이터만 복구하고 새로 사요. 선물이라고 생각해.” 지출 허가가 아니라 위로처럼 들렸다.


그날은 딸아이의 대학 졸업식이었다. 노트북을 살리지 못한 채 행사장에 도착했지만, 졸업가운을 입고 환하게 웃는 아이를 보는 순간 알았다. 화면은 꺼졌어도 삶은 선명하게 켜져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때, 꿉꿉하던 하늘에서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겨울이 다 지나 봄이 문턱에 섰는데, 마치 졸업을 축하하듯 뒤늦게 내리는 눈이었다. 다 늦게 철든다는 말이 이런 걸까. 겨울이 철이 들어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듯했다.


그 눈발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우리는 쉽게 끝이라고 말하지만 계절은 늘 다른 선택을 한다. 겨울이 한 번 더 눈을 내리고, 봄은 그 위로 올라선다. 고장이 나야 교체를 고민하고, 멈춰야 방향을 다시 잡는다.


수리점에서 어떤 사망진단이 내려지든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데이터가 살아 돌아오면 감사한 일이고, 새 장비를 들이게 되면 새로운 시작일 뿐이다. 기계는 멈출 수 있어도 나는 계속 써 내려가면 된다.




눈은 잠시 내리다 녹아내렸고, 걱정도 그 눈처럼 사라졌다. 늦게 철든 겨울 덕분에 나는 조금 일찍 철이 들었다. 끝났다고 생각한 자리에서 눈이 내렸고, 고장이라 여긴 순간에 축복이 포개졌다.


계절은 지나가고 파일은 다시 저장하면 되며 삶은 언제나 재부팅된다. 오늘의 결론은 분명하다. 흐린 하늘도, 고장 난 기계도, 늦게 내린 눈도 결국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희망은 언제나 마지막에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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