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눈부신 여름

by 글 쓰는 여자



여름이는 마치 할 줄 아는 말이 한 가지밖에 없는 사람처럼 매일 같은 질문을 했다.

엄마, 우리 집에 언제 가?

3주 후.

3주나?

응.

그 대화는 하루에 50번씩 반복됐다. 그제도, 어제도, 그리고 오늘도 서인은 3주 후에 집에 갈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여름이는 단 한 번도 '왜 매일 3주라고 하느냐'라고 되묻지 않았다.


서인은 폼클렌징과 칫솔 같은 세면도구와 함께 책 몇 권을 병원으로 가져왔다. 격일로 재준과 교대를 해서 많은 짐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책들 중 일부는 작은 도서관에서 빌린 것이었는데, 그곳은 서인이 산책 삼아 자주 찾던 장소였다. 큰길을 건너 공원에 들어서는 순간, 놀랍게도 도시의 소음이 뚝 끊기고 마치 숲 속에 들어온 듯한 평온이 찾아왔다. 공원 끝자락에서 아파트 단지로 들어서는 한쪽에 자리한 도서관은 규모가 아주 작았다. 운영 시간도 평일 오후 1시부터 4시간 정도뿐이라, 그 시간에 맞춰 가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도 서인은 도서관까지 걸어가 책을 고르고 잠시 앉아 쉬어가는, 그 모든 과정을 좋아했다.


책을 병실 침대 옆에 있는 장에 정리해 두려 했으나, 하나씩 꺼낼 때마다 잠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맨 처음 집어 든 책의 제목은 『제철 행복』이었다. 제철 행복이라니... 나는 지금이 어떤 계절인지 조차 모르겠다. 서인은 그 책을 도로 캐리어에 쑤셔 넣었다. 그 밑에 있던 책을 꺼냈다. 『가족이지만 타인입니다 』 서인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럼 나는 어쩌란 말인가. 이 책도 다시 캐리어 속으로 밀어 넣었다.

여름이는 몸이 약해져서인지 밤 9시도 채 넘기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가끔은 8시가 되기 전에 깊은 잠에 빠지곤 했다. 아이가 잠든 뒤, 병실엔 다시 고요가 내려앉았다. 서인은 조용히 노트북을 열었다. 그리고 그날의 진료 내용, 검사 결과, 의료진의 설명을 짧게 메모했다. 누구에게 보여줄 것도 아닌, 비공개 블로그였다. 기억해 두기 위해, 정리하기 위해, 그리고 가끔은 마음을 붙잡기 위해 썼다.


7/25

06:00 혈액 검사

09:00 아침 식사: 연하 보조식 2단계(치료식, 죽), 케프라 정(500mg)

13:00 점심 식사: 금식

12:00 정맥주사(본 스캔 전)

13:00 성형외과 치료(허벅지)

14:00 안과 검사

16:00 본 스캔

18:00 저녁 식사: 연하 보조식 2단계(치료식, 밥)

20:00 잠듦

21:00 리스페달정(1mg), 케프라 정(500mg) 복용(깨워서 복용)

22:00 프리세덱스 1.4

*기저귀 소변량 체크 시작

*서인 자는 날


여름이와 나눈 대화도 생각나는 대로 정리했다.


오른손이... 안 움직여.

괜찮아. 재활하면 움직일 거야.

오른손이 움직이면 내가 밥을 먹을 텐데...

괜찮아. 여름이 아기 때 생각나고 좋은데, 엄마는.

그림을 그려야 하는데 오른손을 다쳤네.

그림 그리는 거 안 힘들었어?

아니.

그렇구나. 천천히 쓸 수 있을 거야. 걱정하지 마.





병원의 밤은 빨리 찾아왔다. 하지만 완전한 어둠은 병원에 없었다. 불이 꺼진 병실에도 각종 기계에서 나오는 불빛은 사그라들지 않았고, 복도에서는 이따금 간호사의 발소리가 스쳤다.


서인은 노트북을 열고, 검색창에 '슬픈 책 추천'이라고 적었다. 가장 많이 언급된 책은 『세상의 마지막 기차역』이었다. 서인은 가을이 학교 전자도서관에 로그인했다. 대출 가능한 상태였다. 서인은 책을 빌리고 다운로드하여 읽기 시작했다.


『세상의 마지막 기차역』은 대형 열차 사고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들이 주인공이다. 사고 이후 삶이 멈춘 듯한 유가족들 사이에, 사고 현장 인근 ‘니시유이가하마 역’에 가면 유령 ‘유키호’의 도움으로 그날의 열차에 다시 탈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진다. 단, 반드시 지켜야 할 네 가지 규칙이 있으며 어길 경우 죽을 수도 있다. 죽은 피해자가 승차했던 역에서만 열차를 탈 수 있고, 피해자에게 곧 죽을 운명이라는 사실을 절대 알려서는 안 되며, 열차가 니시유이가하마 역을 통과하기 전에 반드시 다른 역에서 내려야 한다. 마지막으로, 죽은 사람을 만난다고 해서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그들을 구하려 하거나 하차시키려는 순간, 그들은 원래 현실로 돌아가게 된다.


책 속의 네 명의 인물은 그 위험을 감수하고 열차에 오르는데, 이유는 단 하나—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다. 살릴 수 없다는 슬픔이 되풀이되더라도 사랑하는 이를 보지 않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평생을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 꼭 사랑하는 이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그들은 열차에 오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한다.


네모토, 다음 주 생일날, 카레 만들어줄게.

… 아버지, 나한테는 어떤 일이 맞을까요?

나는, 가즈유키를 좋아합니다.

잘 다녀와요.


나는 담담하게 읽었다. 살아 있으되 닿을 수 없는 존재를 매일 바라보는 일은, 죽음보다 더 고통스럽다고 느꼈다. 죽음처럼 완전한 이별도 아니고, 그렇다고 예전처럼 함께 살아갈 수도 없는 상황. 앞으로의 시간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두려운 지금.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인사를 건넬 수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게 차라리 덜 아플 것 같았다.





밤 11시에는 간호사 교대가 있다. 낮 3시부터 11시까지 근무했던 간호사가 다음 근무자에게 업무 인계를 했다. 환자에 대해 간단한 사항을 전달받은 간호사는 여름이의 혈압과 체온을 재고 나갔다. 서인은 몸을 일으켜 인사를 하고 다시 노트북을 들었다.

사고를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보다가 『지선아 사랑해』를 읽기 시작했다. 이 사고는 오래전 뉴스에서도 크게 보도되었던 기억이 있다. 2000년 7월 30일, 스물세 살 이지선은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를 마친 뒤, 오빠의 차를 타고 귀가 중이었다. 그때 음주운전자가 낸 7중 추돌사고로 전신 55퍼센트에 3도 중화상을 입었다. 전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한 화상이었고, 의료진조차 비관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녀가 겪은 고통이 적나라하게 쓰여 있어, 읽다가 몇 번이나 눈을 감고 힘든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다. 다만 간증 도서처럼 느껴질 만큼 종교적인 색채가 짙은 부분은 불편했고, 서인은 그 대목은 대충 넘기며 읽어 나갔다.


아버지의 사정 끝에 찢어진 뒤통수를 꿰매고 온몸을 붕대로 감고, 겨우 CT촬영을 할 수 있었고, 다행히 뇌는 다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 문장을 읽자마자 서인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온몸에 화상을 입고 생사의 경계에 선 그들조차, 다행히 뇌는 다치지 않았다고 안도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그 순간 서인은 그들이 부러웠다. 마치 그들이, 우리는 뇌를 다치지 않았어,라고 자랑하는 것 같아 서인을 절망으로 몰아넣었다. 뇌를 다친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한단 말인가…, 서인은 노트북을 덮었다.




병원에서는 밤만 일찍 찾아오는 것이 아니었다. 새벽부터 검사가 시작되는 날도 많았고, 어떤 날은 새벽 4시에 MRI 검사가 잡히기도 했다. 재활이 시작되면서, 재활의학과 앞이나 검사실 복도, 대기실, 그리고 병실에서 여름이를 기다리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다.


몇 달 전에 정인이 빌려준 책을 이제야 읽기 시작했다. 서인은 매일 책을 읽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책은 서인에게 선택받지 못한 채 책장 한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 책은 마쓰이에 마사시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였는데, 서인을 위로하기 위해, 좋은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책 속의 조용한 문장들이 서인의 마음에 들어왔다.


책을 읽는 동안 서인은, 나뭇잎 사이로 눈부신 햇살을 받고, 소리 없이 흐르는 바람을 맞았다. 화자인 건축가 사카니시 도오루는 어느 해의 여름을 오랫동안 기억했다. 그는 그 여름,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바람을 만났다고 했다. 서인의 여름도 그렇게 오래 머물기를, 이 계절이 언젠가는 가장 따뜻한 바람이 불었던 여름이라고 기억되어 주길 소망했다.



"슬픔도 그냥 그 자리에 있게 두렴. 억지로 밀어내지 말고, 오히려 살며시 옆에 두고 지내는 거란다."

-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포리스트 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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