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것들

눈부신 여름

by 글 쓰는 여자



모두를 지치게 했던 섬망 증상은 다행히 5일 만에 사라졌다. 아직 어려서 회복 속도가 놀라울 정도로 빠르다고 했다. 사고 이후 여름이는 오른손을 제대로 쓸 수 없었고, 골반뼈 골절로 인한 신경 손상 탓에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 기저귀를 차야 했다.


흉추와 골반뼈 골절로 스스로 걷지 못해, 검사나 진료가 있을 때마다 이송기사님의 도움으로 침대째 이동해야 했다. 허벅지 외상 부위는 중환자실에 있을 때부터 괴사 조직 제거 수술을 여러 차례 받았고, 이후로는 매일 소독 치료가 이어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상처 부위에 조직액이 계속 고이자 음압기(NPWT)를 부착했다. 음압기는 상처에서 나오는 삼출물을 지속적으로 흡입해 감염을 막고 회복을 돕는 장치였다.





사고 후 여름이는 대부분 눈을 감은 채 지냈다. 가끔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이 되면 아주 잠깐 눈을 떴다. 그리고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으로 간호사들을 향해 말했다. 지금 나랑 협상하자는 거예요? 이해만 하고 그냥 가는 거예요? 평소 여름이는 유난히 어른에게 예의 바르고 조심스러운 아이였다. 그런 아이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은, 듣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재준이 평소처럼 농담을 건넬 때면, 여름이는 잠깐 재준과 눈을 맞추고 살짝 웃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조차 눈은 힘겹게 추켜올리는 듯했고, 웃는 모습도 예전 그대로는 아니었다.





섬망 증상이 가라앉고 열흘쯤 지났을 무렵, 여름이의 눈이 조금씩 자연스럽게 떠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중환자실 때부터 눈물을 흘리던 왼쪽 눈은 달랐다. 눈꺼풀은 반도 채 올라가지 않았고, 제자리를 벗어난 동공은 초점을 잃은 채 흐트러져 있었다. 사물이 두 개로 겹쳐 보인다는 복시 증상은, 여름이가 자신의 증상을 제대로 말할 수 있게 된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안과 의사는 3번 뇌신경인 동안신경 마비와, 2번 뇌신경인 외상성 시신경병증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지금 할 수 있는 건, 기다리는 것뿐입니다, 하고 말했다. 병원에서 만난 모든 의사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기다려봅시다, 지켜봅시다, 였다. 4개월 동안 그 말만 수백 번 들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아무 희망도 담지 않은 말을 하는 그들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가득했다.


안과 진료 후 서인은 동안신경 마비에 대해 검색했다. 많은 질문과 대답을 읽었다. 대부분의 질문은, 저희 어머니가, 남편이, 아내가 동안신경 마비로 힘들어해요. 좋아질 수 있나요? 였고, 역시 대부분의 대답은, 예후가 좋지 않습니다, 였다. 서인은 관련 사진들을 찾아보고. 다시는 여름이의 증상에 대해 알아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무엇보다 뇌를 다친 여름이는 마치 아기처럼 현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기억은 4년 전, 예중 2학년 시절에 멈춰 있었다. 갑자기 말짱한 사람처럼, 곧 예고 입시를 봐야 하는데, 손 때문에 어떡하지? 하며 걱정했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는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돌아올 거라고 했다. 하지만 서인은, 적어도 사고와 관련된 기억만큼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다.





담당 외과의사가 서인과 재준을 함께 만나고 싶다고 해서 재준이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병원에 도착했다. 간호과장까지 네 사람은 사무실로 들어갔다. 의사는 외과적 치료가 마무리되면 다시 찾아올 수 있는 위험한 상황에 대비해, 폐쇄병동으로 옮겨 집중적인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여름이 같은 환자는 퇴원 후, 같은 사고로 다시 실려 오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기껏 힘들게 고쳐서 내보냈는데, 다시 들어온다니까요, 의사는 자신이 한 일이 모두 헛수고가 되는 걸 참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폐쇄병동’이라는 말에 서인은 잠시 현기증을 느꼈지만, 곧 지금까지 겪은 일들에 비하면 그조차도 감당 못할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이의 엄마가 불쑥 끼어들며 말했다.

“암일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아는 건, 그리고 물론 당신도 잘 알겠지만, 당신의 삶이 이제 막, 아니 이미 변했다는 겁니다. 앞으로 기나긴 싸움이 될 거예요. 남편분도 잘 들으세요. 서로를 위해 자기 자리를 잘 지켜줘야겠지만 필요할 때는 꼭 충분히 쉬어야 합니다. 이런 큰 병을 만나면 가족은 하나로 똘똘 뭉치거나 분열하거나 둘 중의 하나가 되죠. 그 어느 때보다 지금 서로를 위해 각자의 자리를 잘 지켜야 해요.”

- 숨결이 바람 될 때 (폴 칼라니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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