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있는 밤

눈부신 여름

by 글 쓰는 여자



짧은 낮잠에서 깨어난 여름이가 말했다, 신사 숙녀 여러분이라고 할래, 서인이 물었다, 언제? 비번 누르기 전에. 여름이는, 3.95 정도가 적당할 것 같아, 한예종은 입시 비리가 있어, 와 같은 맥락도 없고, 말도 안 되는 말을 하곤 했다. 서인과 재준은 웃으면서 대답을 해주었지만,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서인은 거의 공포감에 가까운 감정이 들었다.


진료도, 검사도, 재활도 없는 한가한 토요일이었다. 서인은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 여름이를 휠체어에 앉혔다. 두 병원 건물을 연결하는 브리지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한쪽에는 한강이 보였고, 맞은편에는 병원의 주차동과 의과대학 건물이 보였다. 주차건물의 옥상은 녹지로 덮인 '그린 루프' 구조로 설계되어 있었다. '도시 속 작은 숲'을 지향해서 설계한 이는 우리나라 1세대 조경가 정영선 씨였다.


그해 봄, 서인은 정인의 제안으로 부모님과 함께 국립현대미술관을 갔었다. 그때 열리고 있던 전시 '이 땅에 숨 쉬는 모든 것을 위하여'를 관람했는데, 정영선 씨가 설계한 곳들이 전시되어 있는 공간이었다. 엄마, 저기가 작년 여름에 같이 갔었던, 우리 집 건너편 공원이네, 서인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서인의 아빠는 정영선 씨가 당신과 같은 나이라며, 참 대단하다고 감탄했다. 서인의 부모님은 평소에 관심이 없던 분야에도 기회가 생겼을 때는 적극적으로 보고 듣는 분들이었다.


전시 관람 후 로비 가까이 있는 한정식 식당에서 늦은 점심식사를 했다. 창밖으로는 경복궁 담장과 지붕들이 보였고, 화려한 한복을 입은 금발의 외국인들이 생기 넘치는 표정으로 무리 지어 걷고 있었다. 부모님이 맛있게 드시는 모습을 보니 서인과 정인은 마음이 좋았다. 두 사람은 가끔 부모님과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럴 때마다 부모님은, 어느덧 다 커 제 가정을 꾸린 딸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무척 좋아하신다는 것이 느껴졌다.


며칠 후, 우연히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정영선 님이 출연한 것을 보았다. 그녀는 남편이 오랫동안 아프면서 여러 병원을 옮겨 다녀야 했고, 그때 정말 많이 울었다고 했다. 하지만 어느 병원에서도 마음 놓고 울 수 있는 자리도, 편히 쉴 공간도 없었다. 그래서 병원의 자문을 의뢰받았을 때, 자신의 경험을 살려 직접 설계에 참여했다. 환자나 보호자가 홀로 울고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때는 무심코 흘려 들었는데, 지금 그곳에 서인이 와있었다. 휠체어에 앉은 딸과 함께. 그것은 우연일까, 아니면 예정된 만남일까. 서인은 쓴웃음을 흘렸다.





휠체어를 밀어 지하 1층으로 내려갔다. 평일보다 확연히 조용하고 한산했다. 없는 것이 없는 마트에는 매주 팝업이 열려서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는데, 오늘은 무얼 팔고 있을까 내심 기대하며 들어갔다. 그날은 반건 고구마를 팔고 있었다. 적당히 말려 윤기 도는 황금빛 고구마가 촉촉하게 빛났다. 판매원이 손톱만 하게 자른 고구마를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내밀었다. 달콤하고 쫀득했다. 적당히 담아 무게를 달고 계산을 마쳤다. 베이커리를 지나 작은 쇼핑몰로 들어섰다. 서점, 화장품, 옷 매장을 스치듯 바라보며 걸음을 옮겼다. 선글라스나 옷을 구경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마도 환자의 곁을 지키는 보호자들일 것이고,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온 이들일지도 몰랐다.


병실로 돌아가기 위해 환자용 엘리베이터를 탔다. 여름이가 엘리베이터 벽면 거울 속 자신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동안 거울을 찾지 않은 것이 서인은 의아했었다. 여름이는 늘 거울을 보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병실에 돌아와 침대에 앉은 여름이가 절망 가득한 소리로 말했다, 내 왼쪽 눈 어떡해…, 여름이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이 느껴졌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서인은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상황이 눈앞에 닥쳤음을 알았다.







병원에서 재준과 교대하고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면,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는 며칠을 보냈다. 나의 세상은 처참히 무너졌지만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건재했다. 마주치는 이들은 모두 바쁘고 건강해 보였다. 그들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들에겐 어떤 고민이 있을까. 나만큼의 고통을 견뎌본 적이 있을까. 그들은 불행을 모르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는 길엔 막힌 둑이 무너지듯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집에 도착하면 샤워를 하고 마라샹궈 같은 음식을 배달시켜 맥주와 함께 먹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볼 수가 없었다. 예능 프로그램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것이 알고 싶다'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를 틀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건 사고가 일어나는지를 보며, 낯선 사람들의 고통에 함께 마음 아파했다. 나 말고도 힘든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 미안하게도 위로가 되었다.





텅 빈 집에서 서인은 엄마를 불렀다, 엄마… 엄마, 나 어떡해… 우리 여름이 어떡해… 엄마, 우리 이제 어떡해….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거실을 울렸다. 요상한 자세로 그루밍을 하던 소금이가, 낯선 울음소리에 동작을 멈췄다. 한참을 서인을 바라보다가, 하던 그루밍을 마무리했다.


하루는 멀리 있는 엄마를 목놓아 부르고, 언니도 부르며, 미친년처럼 울부짖다가 다음 날엔 가여운 여름이에게 온화한 미소로 희망 가득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하루는 뜨거운 불구덩이에서 헤매다가, 또 다른 하루는 핑크빛 미래를 꿈꾸었다. 실제로 밝은 미래를 꿈꾸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여름이에게는 그렇게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았다. 두 가지 모습 모두 서인의 모습이긴 했다. 끔찍한 불행 속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서인, 아이와 함께 아직 긍정의 끈을 붙잡고 있는 서인, 그 모든 것이 그녀였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여 있던 중환자실의 여름이를 떠올릴 때는 그저 망연자실한 채 하루하루를 버텼다. 이제는, 이전과는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여름이를 바라봐야 했다. 그것은 실로, 또 다른 형태의 슬픔이자 고통이었다. 서인은 애써 밝은 미소를 지으며 근거가 있는지도 모를 말들로 여름이를 위로하고, 돌아서서는 입술을 깨물었다.


희망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아직 희망이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더 이상 희망을 이야기할 수 없고, 현실을 받아들여야 할 날이 온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여름이의 오른손을 영원히 사용할 수 없다면, 왼쪽 눈이 영원히 이상하다면, 영원히 걸을 수 없다면, 뇌의 기능이 떨어진 채 평생을 살아야 한다면, 모든 것이 전처럼 돌아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왜 난 이 지경이 되도록 손을 놓고 있었던 걸까. 왜 여름이가 나아지고 있다는 주제넘은 판단을 한 걸까. 왜 잘 지내고 있다고 안심하고 있었던 걸까. 그러고도 내가 엄마인가. 여름아, 미안해. 서인의 눈물이 마르지 않는 밤이 이어졌다.


살아남은 것이 과연 다행인 걸까, 끔찍한 생각에 스스로를 혐오했다.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들 — 차라리 죽는 게 나았을까, 죽음을 받아들이는 슬픔이 차라리 더 깔끔했을까. 그 말들이 가족을 잃은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지 모르지만, 서인은 솔직히 두려웠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저런 아이를 두고 어떻게 먼저 떠날 수 있을지, 죽을 때는 과연 눈을 감을 수나 있을지.





며칠 안 보이던 수간호사가 병실에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여름아, 네가 이제까지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을 해냈는지 알아야 해. 앞으로도 분명히 잘 해낼 거야, 그녀는 크고 명랑한 목소리로 여름이에게 말했다. 느닷없이 화장실로 가서 세수를 하고 나온 재준의 두 눈이 빨갰다. 내일이면 여름이는 수간호사가 한 이야기를 잊을 것이다. 서인은 자주 말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네가 얼마나 운이 좋고 엄청난 기적을 이룬 아이인지를.


자신의 생각을 또렷하게 말할 줄 알고, 예쁘면서도 꾸미기를 잘하고, 팔다리가 길어 어떤 옷도 멋지게 소화했던 여름이. 그림을 잘 그리고, 영화를 사랑하고, 노래를 부르기를 좋아하던 아이. 그 모든 모습은 - 여름이를 가장 사랑하는 서인과 가족들의 기억 속에 언제나 빛나는 한 장면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서인은 살면서 처음으로 생각했다. 죽을까, 여름이와 같이 죽을까. 그래,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어. 죽는 방법이 있었어. 서인은 마치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아주 중요한 것을 찾아낸 듯 기뻤다. 그래, 나중에 죽으면 되지, 정 안 될 때 그때 죽으면 돼, 그러니 지금은 너무 힘들어하지 말자,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우리 가을이는…? 그러면 우리 가을이는 어떻게 되는 거지? 서인은 또다시 눈앞이 캄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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