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여름
며칠 새 여름이는 세상 온순한 아이로 변해있었다. 또다시 언제,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지금의 모습은 놀랍고도 낯설었다. 살면서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순해졌다고 해서 꼭 좋은 변화라 할 수는 없었는데, 그것은 여름이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어릴 적부터 하고 싶은 말은 끝까지 하는 아이였고, 고집 또한 센 편이었다. 기 센 걸로는 어디 가서 지지 않을 재준도 세 살의 어린 여름이에게 두 손 두 발 다 든 적도 있었다. 무난하다 못해 둔감한 편인 언니 가을이와는 상반된 아이였다. 또한 여름이는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행동을 무척 싫어했다. 다인실의 맞은편 환자의 보호자가 늦은 시간까지 스피커폰으로 스포츠 중계를 틀어놓는 것이나, 옆 병상의 환자가 아들의 여자 친구 욕을 병동의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소리로 통화하는 행동은, 평소의 여름이라면 참을 수 없어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 상황에서도 미소를 머금고 “그래?” 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모든 것을 이해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름이의 모습에 서인은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조금씩 기억이 돌아오면서 여름이는, 왜 병원에 와 있는지, 어디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끊임없이 물었다. 자신의 핸드폰과 아이패드를 가져다 달라고 했지만, 서인은 '방에 없더라'라고 얼버무렸다. 여름이는 봄에 이사 온 것을 떠올렸고, 3월에 편입한 뒤 가장 먼저 친해진 친구의 이름을 기억해 냈다. 자려고 누웠다가 갑자기 눈을 뜨더니, 이민철 선생님이다, 라며 담임 선생님의 이름을 부르기도 했다.
여름이의 기억이 쏟아져 나오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고, 그만큼 서인의 불안도 커져갔다. 내일일까, 모레일까, 아니면 지금 당장일까. 사고의 기억까지 떠올리는 순간이 오면— 엄마, 내가 그런 것 같아. 엄마, 내가 그랬어. 서인은 고개를 저었다.
신기하게도 여름이는 과거에서 현재로, 정확한 순서대로 기억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서인은 현실을 외면하고 싶어졌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이 어딘가에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책 『미드나잇 라이브러리』의 자정의 도서관처럼, 영화 『어바웃 타임』의 어두운 옷장 속처럼. 과거를 바꿀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거울 앞에 서면,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간신히 버티고 있는 자신과 마주할 뿐이었다, 너 맞지? 정말 이게 너에게 닥친 일이 맞는 거지? 거울 속의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2인실에 머물렀던 때에, 서인은 옆 병상 환자의 보호자를 복도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다. 환자와 보호자는 60대쯤 되어 보였고, 자매 사이 같았다. 두 분은 병실에서 소곤소곤 조심스레 이야기하며 간간히 웃기도 했다. 슬픔과 고통만이 있을 것 같은 병원에서도 웃을 일은 있었다. 보호자분은 옷차림이 늘 화사했고 밝은 목소리를 하고 있었는데, 서인을 마주치고는 근심 가득한 얼굴이 되었다. 그녀는 부모의 마음으로 너무 걱정되고 안쓰럽다며, 실례를 무릅쓰고 여름이에 대해 물어봐도 되겠냐고 양해를 구했다, 무슨 사고가 난 거예요? 여름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생각조차 없었는데, 그 순간 서인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이제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커튼 너머에서 옆 환자분이 퇴원 준비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정리를 끝내고 서인과 여름이에게 다가오시더니 그동안 코를 골며 자서 미안했다며 파운드케이크 박스를 여름이에게 내밀었다, 예쁘게 생겼구나. 어리니까 빨리 나을 거야. 겨우 사흘을 같은 병실에서 머물렀을 뿐이고, 다시는 만나지 않을 사람에게 선물과 덕담을 건네는 그녀가 정말 고마웠다. 여름이도 작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그분이 떠나자, 여름이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저분들은 좋겠다… 집에 가서. 나도 빨리 집에 가고 싶다.
서인은 점심으로 먹을 김밥을 포장해 병원으로 향했다. 김밥을 원래 좋아하긴 했지만, 이렇게 자주 먹은 적은 없었다. 질리지 않으려 집 근처 여러 김밥집을 돌아가며 사갔다. 방송에 소개된 유명한 집에서 소시지 김밥을 사기도 했고, 서인이 가장 좋아하는 로메인이 들어간 스팸김밥이나 키토 크림치즈호두김밥을 사가기도 했다. '이름은 싸다면서 전혀 싸지 않은' 김밥집은 국물 포장이 가능해 재준이 특히 좋아했다.
재준은 늦은 점심으로 김밥을 먹으며 오전에 있었던 일을 쏟아냈다. 회진이 끝나고, 여름이가 듣지 않도록 복도로 담당 교수를 쫓아가 물었다고 했다, 여름이가 눈 때문에 걱정이 많습니다, 앞으로 어떨 것 같으세요? 교수는 짧게 답했다, 더 지켜봅시다. 그녀는 냉큼 뒤돌아 늘 함께 다니는 무리와 우르르 떠나버렸다고 했다. 저만치 걸어가던 교수가 전문의와 간호사들에게 말하는 것이 재준의 귀에 들어왔다, 목숨하고 바꿨다고 생각해야지. 재준은 쫓아가서, 그게 보호자가 들리도록 할 말이냐, 하고 따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눌렀다고 했다.
서인이 말했다, 귀도 안 좋은 사람이 그건 또 어떻게 들었대? 재준은 허탈하게 웃었다, 그러게 말이야. 근데 말이지… 아, 이재준, 자식 일이라 참았다. 부모라는 게 이런 거구나 싶더라니까.
2024년 7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해는 잿빛이었고, 그 여름은 잔인했다. 서인은 세상의 끝자락에 겨우 발을 딛고 서 있었다.
사고 이후 여름이의 거의 모든 것이 달라졌지만, 특히 눈에 띄는 변화는 ‘싫어하는 것’이 사라졌다는 점이었다. 기억 속의 모든 사람을 좋아했고, 모든 일을 좋게만 떠올렸다. 지금 마주하는 것들 역시 하나같이 좋다고 했다. 며칠 전 서인은 일부러 여름이에게 물어보았다. 아빠가 기저귀 갈아주는 건 어때? 여름이는 미소를 지으며, 그것도 나쁘지 않은데,라고 답했다. 물론 서인은 실제로 그럴 생각은 없었지만, 여름이의 대답을 듣는 순간, 이것이 단순히 불호가 사라지거나 성격이 온순해진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신건강의학과 선생님이 오신다고 했던 날 저녁이 되어서야 서인은 간호사에게 확인을 부탁했다. 그러나 또 하루가 더 흐른 뒤에야 다른 선생님이 찾아왔다. 담당 선생님이 휴가 중이라는 것이었다. 휴가를 떠나면서도 아무에게도 인계를 하지 않은 상태였다.
담당 정신건강의학과 선생님 대신 오신 선생님은 여름이에게 몇 가지를 물었다. 기분은 어떤지, 화가 나지는 않는지, 몸에 무언가 기어가는 듯한 느낌은 없는지. 그 마지막 질문이 너무 뜻밖이라 서인은 여름이의 대답을 놓치지 않으려 귀를 쫑긋 세웠다. 진료를 마치며 선생님은, 여름이는 아주 긍정적이구나,라고 하셨다.
서인은 선생님을 따라나가며 걱정되던 몇 가지를 물었다. 갑자기 지나치게 온순해진 점, 싫어하는 것이 전혀 없어진 점, 그리고 눈빛의 총기가 사라진 점 등이었다. 그러나 결론은 똑같았다. 더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서인은 물었다, 여름이는 청소년 우울증일까요, 아니면 양극성 장애일까요? 여름이에겐 어떤 진단이 내려진건가요? 선생님은 고개를 저었다. 청소년은 뚜렷하게 진단을 내리기가 어렵다고 했다. 우울증처럼 보이다가도 며칠 뒤에는 아닌 듯하고, 양극성 장애 같다가도 결국은 심한 사춘기 증상일 뿐일 때가 많다는 것이었다, 불안정하고 정체성이 자리 잡는 시기가 아니어서요, 성인이 되어가면서 정확히 판단할 수 있고 또 많은 경우 자연스럽게 호전되기도 합니다. 주저리주저리 묻는 서인의 질문에도 성심껏 답해주시는 모습에, 서인은 오랜만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허벅지 수술을 마치고 진통제를 달고 돌아온 여름이는 여전히 고통을 호소했다. 간호사가 추가 진통제를 놔주었지만, 한동안 끙끙 앓다 겨우 잠이 들었다.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인도 덩달아 지쳐 보호자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창문 너머로 여름 햇살이 병실 깊숙이 스며들었다. 서인은 눈을 감고 그 따스함에 잠시 몸을 맡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