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Self): 감각질(qualia)과 나만의 느낌
융의 영혼의 지도
by 카사노바의 생존 심리학 Mar 27. 2026
마지막으로 살펴볼 개념은 자기(Self)다. 내 생각에는 이 자기의 개념이야말로, 융의 직관적 사유가 가장 깊고도 아름답게 결실을 맺은 결과라고 생각한다. 다만 집단무의식의 전개 과정에서 마지막 단계에 해당하는 ‘자기’는, 오늘날까지도 분석심리학자들 사이에서 해석이 분분할 만큼 명확하게 정의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오히려 융이 평생 직관과 상징, 그리고 체험적 통찰을 중시했던 인물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자기의 개념이 명확한 이론 체계라기보다는 다의적인 상징으로 남아 있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지점에서 프로이트와 융의 사고 방식의 차이는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이론을 가능한 한 논리적으로 정식화하고, 개념 간의 관계를 명확히 구분하려 했던 인물이었다. 그의 글이 오늘날까지도 비교적 이해하기 쉬운 이유는, 사고형의 인물답게 논리 구조가 분명하고 설명의 방향이 일관되기 때문이다.
반면 융의 글은 종종 독자에게 상당한 부담을 준다. 이는 그의 이론이 부정확해서가 아니라, 융이 본질적으로 직관형의 사고를 지닌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직관형의 인물은 개념을 설명할 때 논리적 정의보다 이미지와 상징, 체험의 전체성을 우선시한다. 그 결과 융의 저술은 개념을 ‘이해’하기보다는, 오히려 ‘느끼고 음미해야’ 하는 성격을 띤다.
이러한 차이는 뇌과학에서 말하는 퀄리아(qualia), 즉 주관적인 감각 경험의 문제와도 깊이 맞닿아 있다. 퀄리아는 논리적으로 완전히 설명할 수 없지만, 분명히 경험되는 무엇이다. 융의 자기 개념 역시 이와 유사하다. 그것은 명확히 정의되기보다는, 상징과 체험을 통해 점진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심리적 실재에 가깝다.
퀄리아란 ‘내가 느끼는 나만의 느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여러분 앞에 붉은 사과 하나가 있다고 해보자. 껍질 전체가 매끄럽고 싱싱해 보이며, 한입 깨물면 단맛 속에 약간의 신맛이 느껴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과를 바라보는 여러분 각자의 느낌은 과연 나의 느낌과 같을까? 비슷할 수도 있지만, 전혀 다를 수도 있다. 만약 여러분 중 누군가가 시력에 이상이 있다면, 내가 인식하는 붉은색과는 분명 다른 색을 볼 것이다. 또한 사과와 관련된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이라면, 사과를 보는 순간 부정적인 감정이 먼저 떠오를 수도 있다. 예컨대 사과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이라면, 사과를 보는 것만으로도 과거의 불편했던 기억이 떠올라 몸서리칠 것이다. 이처럼 퀄리아의 관점에서 보면, 동일한 외부 자극에 대해서도 개인이 느끼는 감각과 정서는 필연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러한 퀄리아의 특성으로 볼 때, 직관형의 사고는 사고형에 비해 훨씬 복잡하고 독창적이다. 사고형의 사고는 수학처럼 구조화되어 있어 말로 표현하기가 비교적 쉽고, 다른 사람들의 사고 방식과도 유사한 경우가 많다. 반면 직관형의 사고는 지나치게 독창적이어서, 때로는 직관형 본인조차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명확히 파악하지 못할 때가 있다. 흔히 예술가들에게 갑작스럽게 찾아온다는 영감이 바로 이러한 현상이다. 이러한 이유로 직관형의 인물이었던 융의 글은 많은 사람들에게 유독 난해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프로이트보다는 융의 이론에 훨씬 더 깊이 매료되었다. 어떻게든 융의 사유를 이해하고 싶었다. 그 방법을 고민하던 중, 나는 뇌과학의 퀄리아 개념을 떠올리게 되었다. 즉, ‘내가 융이 되어 본다면 어떨까?’라는 접근이었다. 이를 위해 나는 융의 전집과 다양한 2차 해설서를 반복해서 읽었고, 내가 알고 있던 뇌과학 지식을 융의 이론에 적용해 보았다. 그러던 중, 융이 말한 동시성(synchronicity) 개념이 현대 물리학의 양자론(quantum theory)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점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동시성은 인과적 연결이 없는 사건들이 시공간을 초월해 의미 있게 동시에 발생하는 현상을 설명하는데, 양자론 역시 고전적 인과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비국소적(공간적으로 떨어진 두 대상이 직접적, 즉각적으로 서로 영향을 미치는 양자역학적 성질)인 상관관계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유사성이 많다.
이후 융의 이론을 뇌과학과 양자론의 관점에서 다시 읽기 시작하자, 마치 봄눈이 녹듯 그의 글이 술술 읽히기 시작했다. 나는 융이 분명히 양자론적 사고와 유사한 직관을 바탕으로 사유했으며, 그 결과로 동시성 이론을 발전시켰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융의 입장이 되어 경험해 본, 즉 융 자신의 퀄리아에 최대한 다가가 보았다고 느낀 지점이다. 독자들은 앞으로 이어질 ‘자기’에 대한 설명을 통해, 왜 이 개념이 융의 집단무의식 이론의 정점에 해당하는지를 분명히 이해하게 될 것이다. 특히 자기는 양자론적 사고 없이는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며, 나는 바로 그 지점을 설명하고자 한다.
나는 인간의 집단무의식에는 일정한 발전 단계가 존재한다고 본다. 먼저 오직 본능에 충실한 어린 시절에는 내면의 어두운 욕망인 그림자를 중심으로 살아간다. 이후 교육과 사회화를 거치며 성인이 되어 가는 과정에서는 사회적 가면인 페르소나가 중심이 된다. 그리고 결혼 적령기에 이르면, 또 다른 이성인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외부에서 찾게 된다. 이후, 결혼을 하고 자녀를 양육하며, 직장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 심리적으로 안정되면, 비로소 의식과 무의식이 통합되는 자기실현의 상태에 접근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과정은 개인의 성향, 환경, 노력에 따라 발달 속도와 순서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이를 심리학적 발달 단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아동기는 그림자의 시기이며, 청소년기와 성인기는 페르소나와 아니마·아니무스의 시기이다. 그리고 중년기와 노년기에 이르러서야 이 모든 요소를 통합하는 자기의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물론 이는 가장 이상적인 집단무의식의 발전 경로일 뿐이다. 현실에서는 성인이 되어서도 그림자에 지배당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특히 중년기와 노년기에 자기의 상태에 이르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이유는 집단무의식의 마지막 단계인 자기의 실현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전 단계들이 충분히 성숙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기의 실현은 의식과 무의식이 깊은 균형을 이루는 상태로, 누구나 쉽게 도달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
그렇다면 의식과 무의식이 통합된 자기란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일까? 이는 억압되어 있던 무의식—개인무의식과 집단무의식—을 의식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뒤, 그것을 자신의 의식으로 충분히 이해하고 통합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미 말했듯이, 무의식에는 의식이 감당하기 어려운 부정적이고 충격적인 요소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그 결과 의식은 무의식을 억압하게 된다. 그러나 억압의 힘이 강해질수록 무의식의 에너지 또한 커지고, 결국 언젠가는 폭발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신경증의 한 형태인 히스테리(Hysterie)다.
과거에는 히스테리를 자궁을 가진 여성에게만 나타나는 현상으로 보았으나, 프로이트는 이러한 통념을 깨뜨렸다. 따라서 무의식의 파괴적 반동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점진적으로 의식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를 위한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전문 상담가와의 심층 상담을 통해 자신의 무의식을 분석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동안 외면해 왔던 자신의 어두운 무의식을 보다 정직하게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융은 우리가 의식과 무의식이 완전히 통합된 자기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다만, 그 상태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려는 노력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의식과 무의식을 통합하려는 노력을 지속한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 이에 대해 융의 말을 직접 인용해 보자.
“무의식적인 것을 의식적으로 만들면 인간은 자기 자신의 본성과 더욱 조화를 이룬 생활을 누릴 수가 있고, 초조와 욕구불만을 느끼는 경우도 적어진다. 자기의 무의식을 모르는 사람은 무의식의 억압된 요소를 남들에게 투사한다. 즉, 자기 자신의 결점을 자각하지 않고 그것을 남들에게 전가시켜 남들을 비판하고 힐난한다. 무의식을 자각하면 이 투사들이 환히 드러나 비난만 하고 비웃기를 잘하던 그의 인간관계는 개선되고, 그는 타인 및 자기 자신과 더욱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느낀다.”
― 『융 심리학 해설』 중
어떤가? 비록 예수나 석가처럼 인류 전체를 구원하는 삶은 아닐지라도, 자기 실현을 향한 노력만으로도 충분히 조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지 않겠는가. 융은 또 이렇게 말했다.
“자기는 인생의 목표이다. 자기는 우리가 개성이라 부르고 있는 운명적 통일체의 가장 완벽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 『융 심리학 해설』 중
의식과 무의식의 통합을 통한 자기 실현, 융은 이것을 인생의 궁극적 목표로 보았다. 여기까지의 설명만 보면, 자기 실현에 도달한 사람은 모두 선한 존재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나의 뇌과학적 분석에 따르면, 소위 말하는 악인들 중에서도 자기 실현의 단계에 도달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자신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육체적·정신적으로 약한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이용하며 사회에 큰 피해를 끼친다. 이 책에서 반복적으로 언급하는 카사노바와 앞으로 언급할 다단계 사기꾼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