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 아버지가 만든 기준과 그 자리에 남은 엄마의 말
아버지는
성실과 규칙으로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저녁 6시가 지나 밖에 다니는 일은
이해하지 못하는 분이었다.
그런데도 자식은 그 기준밖에서 잘 살아갔다.
연애도 하고, 결혼도 했다.
어쩌다 아버지가 늦게 들어오시는 날이면
엄마와 방에 누워
괜히 신이 났다.
“오늘은 늦게 오셔서 좋다.”
그렇게 웃다가도
현관문 소리가 나면
엄마는 금세 표정을 바꾸고
아버지를 맞았다.
그 집의 질서는
늘 그렇게 지켜지며 조용히 단단했다.
아버지는
마흔부터 제주도를 시작으로
엄마와 함께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흔이 될 때까지
거의 세계를 한 바퀴 도셨다.
작은 딸이 이민을 간 뒤에는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다며
74세에 직접 찾아오셨다.
고등학생이던 손자를 앉혀 놓고
지구본을 돌려가며
나라를 짚어 질문을 던지시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손자는 당황했고 나는 웃음이 났다.
내가 캐나다로 이민을 간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말했다.
“모험을 해도 될 나이다. 이제는 세계로 나가야 한다.”
그 말은 내 등을 밀어주는 힘이 되었다.
아흔을 앞두고
아버지의 시간이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돌아가시기 여섯 달 전쯤부터 기억이 희미해졌다.
엄마는 그 시간을 혼자 감당했다.
아들들이 도왔지만
엄마는 누군가에게 맡길 분이 아니었다.
나는 멀리 있는 딸이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마음이 더 컸다.
나는 그 당시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마음에
전화조차 쉽게 걸지 못했다.
그때는 다 내 손으로 해야 하는 일이었다.
한국에 쉽게 나갈 수 없었다.
움직이려면 하던 일을 멈추고 문을 닫아야 했다.
“엄마, 못 가서 미안해.”
그 말에 엄마는 담담하게 말했다.
“야야, 니는 너거 자식들 잘 키운 걸로 효도 다 했다.”
그 말은 내 삶을 버티게 한 가장 큰 위로였다.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뵈러 갔을 때였다.
한때 세계를 향해 나가라 하시던 분이
나를 보자마자 큰소리로 말했다.
“니는 뭣 하러
그 먼 데 가서 그렇게 고생하며 사노”
그 말속에는 걱정이 있었다.
그때 엄마가 옆에서 조용히 말했다.
“야아들은 객지에서 고생은 해도
아아들 다 잘 키우고 잘 살고 있소.
걱정 마소.”
그 한마디는 지금까지도 나를 지켜주고 있다.
아아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것은
자랑할 일도 아니다.
그저 각자의 인생일 뿐이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 아아들이 나의 든든한 울이 되었다.
그리고 엄마의 그 말은
내 안에 남아 나를 지탱하는
작은 존엄이 되었다.
엄마는
늘
주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 리듬 위에서 자라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