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하지 않아도 되는 예술
이 글은
〈이해하지 않아도 되는 예술〉의 연장선에 있다.
그날 미처 다 닿지 못한 시선이 여기까지 걸어왔다.
그날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을
빠져나온 것은 나였지만,
정작 나를 따라 집까지 찾아온 것은
마그넷 속 화가의,
나를 위로하고 지켜보는 지독한 시선이었다.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나는 무심코 그 작은 얼굴과 눈을 마주친다.
먹을 것을 찾으려다
생각을 멈추게 되는 순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얼굴이다.
그렇게 마주친 시선 끝에서,
나는 고흐의 편지 한 문장을 다시 펼쳐 보게 된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씨 속에서도 나는 캔버스를 들고나간다. 자연이 내뿜는 그 강렬한 색채를 놓치지 않으려면 잠시도 쉴 틈이 없다. 한 점을 마치고 나면, 나는 더 굶주린 상태가 되어 다음 풍경을 찾아 헤맨다. 지금 그린 그림이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괜찮다. 이 그림을 그려냈기에 나는 다음 그림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되었으니까 ]
나는 그의 편지 속에서 발견한 나와의 같은
심장박동을 알고 놀란다.
예술가로서의 격이나 차원은
감히 비교할 수 없지만,
무언가를 창작하는 사람의 ‘심장 박동’ 만큼은
같은 박자로 뛰고 있음을 나는 내 안에서 본다.
고흐가 뜨거운 물감을 캔버스에 쏟아붓고
숨을 몰아쉰 뒤 다음
빈 캔버스를 집어 들 때의 갈증처럼,
나는 한 편의 글을 마감하자마자
마음속에서 샘솟는 다음 문장들을 향해
가슴이 다시 뛰기 시작한다.
편지를 덮고 나니 오르세 미술관에서
〈론 강 위의 별이 빛나는 밤〉 앞에 서 있던
한 금발의 여인이 떠올랐다.
그녀는 자리를 옮겨 가며
그 그림 앞에 오래 머물러 있었다.
이해하려는 태도가 아니라,
몸이 먼저 반응하는 쪽으로
시선을 옮기고 있었다.
그 움직임이 고흐의 문장에서
내가 발견한 심장 박동과
같은 박자로 뛰고 있었음을 이제야 알아본다.
그림 앞에서
몇 걸음 물러섰다가
다시 옆으로 비켜섰고,
어느새 다른 쪽으로 옮겨
웅크리고 앉았다가
다시 먼발치에서
까치발을 들고
그 밤을 응시했다.
어느 순간에는
바닥에 가까이 몸을 접어 앉았다.
별빛을 보기 위해서라기보다
그 빛이 닿는 자리에
자기 몸을 맞추는 것처럼 보였다.
이해하려는 태도는 아니었다.
다만 반응하는 쪽으로
몸을 옮기고 있었을 뿐이다.
옆에서,
혹은 쪼그리고 앉아서.
그림 속 별빛을
온몸으로 받아내던
그녀의 움직임들.
예술에 대한 감각이 늘 뒤늦게 도착하는 나에게는
액자 속에 고정된 별빛보다 그 빛에 반응하며
시시각각 달라지던 그녀의 뒷모습이
더 예술처럼 보였다.
나는 비로소
내가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전날, 루브르에서는 많은 인파 속에서
작품을 온전히 마주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오르세 미술관은
일부러 늦은 오후에 찾았다.
클로징 시간이 가까워지자
사람들은 하나둘 빠져나갔고,
마침내 작품과 제대로 마주할 수 있는
고요가 찾아왔다.
전시장을 돌다 우연히 보게 된 것은
한 점의 그림이 아니라,
예술 앞에서 반응하고 있던
한 사람의 몸이었다.
그녀의 불규칙한 움직임 속에서
고흐가 캔버스를 들고 폭풍 속으로 나갈 때의
거친 숨소리를 보았다
그날 나는 작품을 보러 갔다가,
예술이 작동하는 순간을 목격했다.
냉장고 문 앞에 서면
그날 미술관의 공기가 다시 돌아온다.
별빛도, 음악도, 그 여인도.
작은 사각형 안에 있는
그의 시선은 여전히 날카롭다.
예술이 나를
위로하고, 지켜보고 있다.
그는 묻지 않는다.
잘 그리고 있는지,
제대로 쓰고 있는지.
다만
멈추지 않았는지를 본다.
그래서 나는 완성된 하루보다
다음 문장을 향해 열려 있는 상태를
조금 더 믿어보기로 한다.
그날 미술관을
빠져나온 것은 나였지만,
아직 끝내 떠나지 못한 것은
그의 시선과
나의 심장 박동이다.
오늘 나는
별빛이 닿는 쪽으로
조용히 몸을 옮겨 본다.
멈추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예술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