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이 모던 미술관 (Remai Modern)
이 글은〈사스카툰의 크기〉에서 시작된 시선이 조금 더 안쪽으로 걸어 들어온 기록이다. 작아 보이던 도시 안에는 생각보다 오래 머무르게 하는 조용한 오아시스들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어느 도시든 자기만의 품격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대개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 채 살아갈 뿐이다. 나는 이 동토의 도시에서 십 년 만에 몇 개의 오아시스를 발견했다. 오래 바라보면 작은 도시는 점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 안에는 사람을 머물게 하는 숨 고르는 자리들이 조용히 숨어 있다.
앞으로 나는 이 도시에서 만난 그 오아시스들을 천천히 기록해 보려 한다.
예술이 도시를 어떻게 품는지, 생명을 보내는 방식은 어떤지, 세계의 문화가 작은 도시와 만나는 순간은 어디인지, 그리고 이 도시가 땅 아래와 하늘 위에서 어떤 균형으로 서 있는지를 조금씩 따라가 보려 한다.
조깅을 하러 레저센터에 갔다가 발길을 돌렸다. 트랙은 육상 경기로 점유 중이었고, 이번에는 안내문을 제대로 읽었다. 일반인은 다른 운동을 하라는, 아주 정중한 안내였다.
몸은 움직이지 못했지만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육체의 음식 대신 정신의 영양이라도 챙기자는 생각으로 차를 몰았다.
목적지는 리마이 모던 미술관(Remai Modern)이었다.
석 달 전, 별 기대 없이 들어간 이 도시의 미술관은 내가 그동안 얼마나 성급하게 예술을 지나쳐왔는지를 조용히 들춰냈다. 현대적인 건물과 과하게 설명하지 않는 큐레이션, 작은 도시의 뮤지엄이라며 마음속에서 미리 낮춰두었던 시선이 그날, 생각보다 쉽게 무너졌다.
작품들은 서로 경쟁하지 않았고, 공간은 충분히 비어 있었으며, 보여주는 미술관’이 아니라 사유가 일어나는 구조를 가진 공간이었다.
좋았다는 말로는 부족한, 다시 확인하고 싶다는 쪽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그 감정으로. 오늘, 미술관을 한 번 더 찾게 되었다.
역시 쾌적했고, 전시는 상당 부분 바뀌어 있었으며, 공간은 여전히 작품을 서두르지 않게 대하고 있었다.
처음의 놀람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이곳이 꾸준히 시선을 관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두 번째 방문에서야 확신하게 되었다
이 리마이 모던 미술관은 강의 흐름을 따라 예술이 놓일 자리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다. 도시는 이 미술관을 통해 스스로를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의 리노컷 작품 400점 이상과 수많은 세라믹 작품을 소유하고 있는 이 미술관은 세계 최대 규모의 피카소 리노컷 컬렉션이라는 사실도 크게 내세우지 않았다. 마치 이 정도의 예술이라면 굳이 과장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리마이 미술관의 공간은 눈에 띄는 제스처보다 여백을 먼저 건넨다.
강 쪽으로 열려 있는 시선, 자연광이 깊숙이 스며드는 동선. 관람객은 작품 앞에서 속도를 늦춘다. 밖은 꽁꽁 얼어붙은 샤스카툰의 겨울이지만, 미술관 안에서 만난 피카소의 리노컷은 남프랑스의 뜨거운 태양과 에너지를 품고 있어 동토 속의 오아시스였다.
이곳에서 예술은 도시를 바꾸기 위해 들어온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리듬 위에 조용히 놓였다. 그리고 나는 알게 된다. 이 도시의 아름다움은 눈에 띄는 변화가 아니라, 조용히 비워 둔 자리에서 자라난다는 것을.
사스카툰은 예술을 통해 커진 것이 아니라, 이미 충분했기에 예술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도시다.
리마이 모던 미술관은 ‘소도시의 미술관’이라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이곳은 캐나다에서도 손에 꼽히는 규모의 현대미술관이며, 국제 전시를 감당할 수 있는 공간과 세계적인 소장품을 동시에 품고 있다. 관광지의 부속 시설이 아니라, 이 도시의 문화적 기준점으로 처음부터 설계된 장소다.
이 사실을 알고 나면 이 미술관은 더 이상 우연처럼 보이지 않는다. 작은 도시에 생긴 예외가 아니라, 의도된 중심에 가깝다. 그 판단의 중심에는 Ellen Remai라는 이름이 있다.
그녀는, 세계적 명성의 전시 공간에 있을 작품들, 특히 피카소의 말년 리노컷 작품들을 이 작은 도시에 남김으로 이 도시를 글로벌 예술 지도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더 유명한 도시도, 더 많은 관객이 있는 곳도 아닌 자신이 살아온 이곳에.
지역 자선가인 그녀는 이 도시에서 살아온 사람으로서 한 가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도시의 크기와
사람들이 누려야 할 정신의 크기는 같지 않다는 사실을. 그 선택은 기부라기보다 판단처럼 보인다.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반복해서 찾아올 만한 예술이 필요하다는 판단.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큰 도시로 이동하지 않아도 정신이 닿을 수 있는 장소가 이곳에도 있어야 한다는 판단.
그래서 리마이 모던 미술관은 전시장이기 전에 이 도시에 대한 신뢰처럼 느껴진다.
사람들이 무엇을 볼 수 있는지, 어디까지 생각할 수 있는지에 대해 기준을 낮추지 않겠다는 태도.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 미술관 앞에 설 때 나는 묘한 자긍심을 느낀다.
이 도시는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않았고, 우리의 정신을 소도시 기준으로 다루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그날 나는 작품 하나하나를 눈에 넣었다.
그림과 그림 사이의 여백까지 읽고 나니 이 공간이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그리고 누군가의 계산된 믿음 위에 서 있다는 감각이 조용히 전해졌다.
지니 마 (JeannievMah ) 작품. 식민 지배의 기반 시설(Colonial Infrastructure)이라는 주제는 캐나다와 미국의 평원(Plains)을 가로지른 철도와 도로를 다르게 보게 만든다. 그 길들은 발전의 통로이면서 동시에 누군가의 삶을 밀어낸 선이었다.
예술가는 속도를 위해 놓인 길 위에서 문명이 남긴 그림자를 읽어 내고, 땅에 새겨진 선들이 인간의 야망과 손실을 함께 기록하고 있음을 조용히 드러낸다.
몸은 오늘 덜 움직였지만 정신은 충분히 밖으로 나왔다고 느꼈다. 도시는 사람의 몸만 관리해서는 유지되지 않는다. 정신이 머물 곳을 함께 마련할 때 비로소 사람을 붙잡는다.
이 작은 도시에 이 정도의 미술관이 있다는 사실은 자랑이기보다 하나의 선언에 가깝다. 그래서 리마이 미술관은 사스카툰의 상징이라기보다 이 도시의 태도에 가깝다.
당신의 삶이 이 정도의 생각과 감각을 감당할 수 있다고 이 도시는 믿고 있다는.
이 도시의 겨울은 길고 단단하지만, 사람은 그 위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숨을 고른다. 나는 그 숨 고르는 장소들을 오아시스라고 부르기로 했다. 동토 위에 핀 한 송이 꽃을 지나, 이제 나는 이 도시가 생명을 바라보는 또 다른 자리로 천천히 걸어가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