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처럼 그리기까지, 평생이 걸렸다
이 글은〈사스카툰의 크기〉에서 시작된 시선이 조금 더 안쪽으로 걸어 들어온 기록이다.
빛이 만들어 내는 공간을
다시 통과하고 싶었다.
햇빛이 금속 격자를 지나
바닥 위에 규칙적인 그림자를 수놓는다.
나는 그 위를
천천히 걷는다.
겹겹이 잘려 들어오는 빛 속에서
거대한 유리창 너머
눈 덮인 풍경이 펼쳐진다.
빛이 건물을 연주하는 이곳에서
나는 마치 빛의 악보 위를 걷는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햇빛을 기다렸다.
오늘,
나는 피카소의 칼맛을 다시 보러
리마이 모던 미술관 (Remai Modern) 안으로 들어갔다.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가 이 도시에 있다는 사실은, 이 도시의 크기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보통 피카소를 떠올리면 파리나 바르셀로나 같은 이름들이 먼저 겹쳐진다. 거대한 미술관, 넘치는 관람객, 작품 앞에서 서둘러 찍히는 사진들. 그래서 사스카툰에서 피카소를 만난다는 건 처음엔 조금 어긋난 장면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도시에 놓인 피카소는 낯설지 않다. 이곳의 리듬이 그렇다. 크지 않아서 비워두는 법을 알고, 빠르지 않아서 반복을 견디는 도시. 사스카툰은 무엇을 과시하기보다 무엇을 오래 두는 쪽에 가깝다.
강을 따라 달리는 러너들의 발걸음처럼 이 도시의 시간은 일정하다.
서두르지 않고, 앞서 나가려 애쓰지도 않는다. 그래서 세계 최대 규모의 피카소 리노컷 컬렉션이 리마이 모던 미술관에 있다는 사실도 이상하지 않게 받아들여진다. 결과보다 과정을, 완성보다 반복을 품는 방식이 이 도시의 결에 맞기 때문이다.
리노컷은 단번에 끝나는 작업이 아니다. 같은 이미지를 여러 번 새기고, 지우고, 다시 찍어낸다. 선은 늘 수정되고, 판은 계속해서 닳아간다.
천재의 번뜩임이라기보다 끝까지 놓지 않는 태도에 가깝다. 그래서 이곳의 피카소는 과장되지 않는다.
이 작품은 피카소가 생의 마지막까지 함께한 자클린의 얼굴이다. 굵은 흑백의 선은 닮음을 쫓기보다 그녀의 존재를 새기는 데 집중했다. 말년의 피카소는 자클린의 얼굴을 통해 형태를 해체하고 다시 세우는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이 작품은 색이 거의 절제되어 있고, 선이 더 직접적이다. 그래서 감정보다 구조와 선의 힘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자클린은 여기서 뮤즈라기보다 피카소의 시선이 머문 자리로 남는다.
피카소의 예술 세계에서 리노컷(Linocut)은 그의 노년기를 가장 뜨겁게 보여주는 작업이었다.
현대 판화사에서 일흔을 훌쩍 넘긴 거장이 새로운 기술에 다시 도전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장면처럼 남는다. 피카소의 말년 리노컷 작업에는 노장이 시간을 대하는 방식이 담겨 있다.
그 혁신은 리덕션(Reduction) 기법이라는 새로운 판화 언어를 탄생시킨다.
피카소는 단순히 기존의 판화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보통 다색 판화를 만들려면 색깔마다 다른 판을 준비해야 한다. 하지만 피카소는 하나의 리놀륨 판으로 여러 색을 완성해 내는 리덕션 리노컷(Reduction Linocut) 방식을 만들어 냈다.
그는 하나의 판을 깎아가며 여러 색을 완성하는 리덕션 방식을 택했다.
가장 밝은 색을 찍고, 다시 판을 깎는다. 한 번 지운 면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남겨야 할 선을 끝까지 상상해야 했다. 그 긴장 속에서 피카소의 말년 감각은 오히려 더 또렷해진다.
그의 말년 리노컷에는 피카소가 평생 붙잡고 있었던 주제들이 더 자유롭고 대담한 선으로 다시 등장한다.
투우 장면에서는 삶과 충돌하는 남성성이 거친 선의 속도로 살아 움직이고, 그의 마지막 뮤즈였던
자클린 로크(Jacqueline Roque)의 얼굴은 수없이 반복되며 사랑이 남기는 시간의 흔적을 보여준다.
피카소는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 같은 대가들의 작품을 리노컷으로 다시 풀어내며 과거의 예술과 조용히 대화를 이어 간다.
남프랑스 발로리스(Vallauris)에서 보낸 황혼기의 작업에는 지중해의 태양처럼 밝고 느긋한 공기가 스며 있다. 노랑과 갈색, 그리고 검정이 강하게 부딪히며 빛의 대비를 만들어 낸다.
그 시간을 지나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이처럼 그리는 법을 배우는 데 평생이 걸렸다.”
피카소에게 판화는 복잡한 유화보다 손끝의 감각이 더 또렷하게 남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곳에서 예술을 다시 놀이처럼 다루기 시작했다. 예술은 늙지 않는다는 말을 나는 여기서 조금 믿게 된다.
피카소에게 리노컷은 쇠퇴하는 육체 대신 마지막까지 타오르던 예술의 불꽃이었다.
리덕션 리노컷은 덧붙이며 완성하는 작업이 아니라 지워 가며 완성하는 작업이다.
한 번 깎아낸 면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다음 색을 찍기 전, 남겨야 할 선과 사라질 면을 끝까지 상상해야 한다. 피카소는 이곳에서 위대한 이름이 아니라 오래 견딘 시간으로 읽힌다.
어쩌면 삶도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완성되는지 모른다. 우리는 무엇을 더 얻느냐보다 무엇을 덜어 내느냐 속에서 자기 모양을 만들어 간다. 돌아갈 수 없는 선택들이 겹겹이 쌓이며 결국 하나의 색이 된다.
나는 그가 남긴 칼맛의 흔적 앞에서 잠시 걸음을 늦춘다.
작품은 소리 없이 놓여 있고, 도시는 그것을 특별히 설명하지 않는다.
이 정도의 깊이라면 이 도시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80대의 노구가 칼을 들고 판을 파낼 때, 그는 손끝으로 전해지는 육체의 저항과 쾌감을 끝까지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그 흔적은 돌과 판 위에 새겨졌다.
그리고 어떤 흔적은 도시의 땅속 깊은 곳에 오랜 시간 묻혀 있다가 다시 사람들의 삶을 움직인다. 나는 이제
이 도시를 지탱하고 있는 또 하나의 흔적의 층을 따라 천천히 내려가 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