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 · 보내는 자의 자리에 서다
밴쿠버에서 한국 영화를 보았다.
오래 적어 두었던 버킷리스트 하나를 지웠다.
타국의 극장에서
한국어가 흐르는 시간.
자막보다 배우의 숨을 먼저 듣고 싶었다.
마지막 장면.
엄흥도의 손이
단종의 목에 맨 줄을 당긴다.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어린 왕을 향한
마지막 예우이자,
고통스러운 생의 굴레를
끝내 드려야 한다는 결단.
“전하, 이제 그만 갑시다.”
그 목소리는
충성인지, 연민인지,
차마 더 보지 못하겠다는 체념인지
분간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잔인했다.
나는 울음을 참느라
숨을 삼켰다.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가슴이 먼저 무너졌다.
영화가 끝났는데
일어설 수 없었다.
시간이 한참 지나도
그 한 단어가 남았다.
간다.
갑시다.
우리는 참 쉽게 말한다.
시간이 간다.
맛이 간다.
잘 나간다.
죽으면 간다.
같은 말인데
도착지는 다르다.
영화 속의 “갑시다”는
끝을 향하고 있었다.
죽음으로 가는 말이었을까.
고통을 끝내러 가는 말이었을까.
아니면
끝까지 같이 가겠다는 말이었을까.
나는 곧 또 떠난다.
일본으로,
한국으로,
맨체스터로.
내 삶도 요즘
자꾸 “간다” 위에 서 있다.
그래서 그 말이
남의 대사로 들리지 않았다.
“이제 그만 갑시다.”
어쩌면 그것은
보내는 말이 아니라
죽음으로 가는 길이더라도
혼자가 아니라는 뜻이었는지 모른다.
고통을 끝내기 위한 도피가 아니라
끝까지 함께 서 있겠다는 선택.
그날 극장에서
나는 한참을 일어설 수 없었다.
보내는 자의 비통함은
밧줄을 당기는 근육의 긴장과
떨리는 목소리로만
설명되지 않았다.
그 여운 속의 울음은
남의 역사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시간을
이미 나도 살고 있다는 사실.
누군가를 보내야 할 나이가 되었고
언젠가 나 역시
보내질 사람이라는 것.
보내는 자는
가는 자의 고요를 안다.
내가 기억하는 가는 자는
언제나 조용했다.
나는 '간다'를 되뇌며
마음 한쪽이 서서히 고요해졌다.
가는 쪽에 가까워졌다는 것은
끝을 향해 선다는 뜻이 아니라
남은 시간을 더 또렷이 본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그래서 나는
슬픔 속에서
조금 더 또렷해졌다.
나는 이제,
간다는 말의 무게를 안다.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에게
조용히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
괜찮습니다.
이제, 같이 갑시다.
나는 이제,
보내는 자의 침묵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