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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제 Dec 31. 2020

성탄절의 깡빠뉴

프릳츠의 크랜베리 호두 깡빠뉴와 아이스라떼

팀북투 프로젝트 1.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는 것 <간식>

팀북투 산문 클럽을 시작하는 첫 프로젝트로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는 것에 대해 기록합니다. 요즘 수제와 키순의 일상을 구성하는 단어들 중 교집합을 추렸습니다. 간식, 새벽, 요가, 원룸, 유튜브(가나다순). 다섯 개의 단어를 중심으로 자전하는 우리의 일상을 때로는 찌질하게, 때로는 명랑하게, 있는 그대로 써보기로 했습니다. 팀북투가 과연 어떤 방향으로, 얼마큼 멀리 가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 시작점은 지금 여기 우리의 작은방이니까요.


화창했던 크리스마스의 하늘

2020년 12월 25일 금요일 오전 11시. 늦잠을 자다 부랴부랴 유튜브를 켜고, 라이브로 진행되는 성탄 예배의 마지막을 지켜본다. 여느 때와 다르게 약속도 계획도 없는 크리스마스다.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세수하고 옷을 골라 입은 후 문을 나선다. 하늘이 파랗다. 아파트 단지 뒤로 봉긋 솟은 북한산 봉우리의 모습이 오늘따라 또렷하다. 마스크 틈새로 차갑고 신선한 공기가 새는, 선명한 겨울이다. 소속된 곳이 없어 매일이 휴일이면서도 제대로 쉰다고 느껴본 날이 드물다. 오늘만큼은 조급함을 잠시 내려놓아도 될 것 같다. 크리스마스라는 단어는 특별하다. 왠지 모를 편안함과 설렘을 주는, 날 좋은 금요일 오후에 빵을 사러 간다.


혼자 산 지 10년이 넘었지만 요리에는 취미가 없다. 하루 두 끼, 단조로운 식사를 한다. 나에게 밥은 아침에 세수를 하는 것 정도의 의식이다. 더 맛있는 음식을 고르기보단 최소한의 칼로리 내에서 필요한 영양소를 고루 섭취하고, 최대한 간편하게 먹을 방법을 고민한다. 먹는 것에 열정이 없는 류의 사람은 아니다. 나는 함께하는 순간의 행복을 충만하게 하는 맛있는 음식, 좋은 분위기를 누구보다 사랑한다. 나의 조촐한 혼밥은 식욕이 왕성한 만년 다이어터로서 실천하는 일종의 절제다. 혼자 먹는 매 끼니가 맛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할 뿐이다.

나의 혼밥 밥상

하지만 간식에 대해서라면 좀 다른 입장이다. 간식은 절제를 실천한 나에게 주는 작은 포상이자 포기할 수 없는 삶의 낙이다. 밥은 함께 먹을 때 훨씬 맛있는 반면 디저트는 혼자일 때에도 온전히 나만을 위한 즐거움을 준다. 내장 깊은 곳에 도달한 작은 디저트 한입은 내 마음을 어루만지고 삶을 위로한다. 짭짤한 것보단 달콤한 쪽을, 밍밍할 만큼 담백하고 고소한 맛을 선호한다. 달콤과 상큼이 어우러지는 순간엔 잠시 행복을 느낀다. 배스킨라빈스 민트 초코, 나뚜루 녹차 아이스크림, 공차 버블 밀크티, 까눌레, 산딸기 마카롱, 따뜻한 라떼와 함께하는 스콘은 사랑이다. 요즘엔 플레인 요거트와 캐슈너트의 조합에 푹 빠졌다.


빵 사러 가는 길은 언제나 기대와 설렘이 충만한 시간이다. 자그마한 냉동 칸에 좋아하는 빵을 가득 채웠을 때의 든든함이란! 보통 역 근처 베이커리에서 빵을 고르지만 오늘은 크리스마스니까 오랜만에 지하철을 탄다. 재작년 이사를 했는데 아직까지 동네에선 마음에 쏙 드는 빵을 찾지 못했다. 여덟 정거장을 지나 도착한 곳은 프릳츠 안국점이다. 프릳츠 커피는 서울에 3개 지점을 운영하는 카페다. 이곳은 카페지만 내가 맛본 가장 맛있는 깡빠뉴를 판다.


프릳츠에 대한 나의 애정이 시작된 곳은 1호점인 도화점이다. 경기도로 이사하기 전 잠시 살았던 마포 도화동은 소위 핫플의 조건과 조금도 연관이 없는 조용한 동네다. 프릳츠는 이런 동네의 뜬금없는 자리에 카페를 열었다. 좁은 골목 안의 오랜 양옥집을 고쳐 수준 있는 커피와 빵을 팔기 시작했고 곧 동네의 자랑이 되었다. 내가 프릳츠를 좋아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커피와 빵 모두를 균형 있게 잘하며 둘째, 언제 가도 같은 감동을 준다. 건물이 지나온 시간을 켜켜이 쌓은 아늑한 공간, 획일화된 유니폼이 아닌 자신의 옷을 입은 직원들, 분주하면서도 자유롭게 또한 질서 속에서 활기차게 일하는 모습 등이 모여 프릳츠만의 분위기를 형성한다.

프릳츠 안국점에서 고른 크랜베리 호두 깡빠뉴와 뺑 오 쇼콜라

2호점인 안국점은 공간에서 흘러오는 매력이 상당하다. 도화점의 양옥집이 비교적 가까운 과거 한국의 집을 보여준다면 안국점은 한국 건축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두 함축한다. 근현대 벽돌 건물과 통유리 건물, 한옥이 조화롭게 자리한 이곳은 김수근 건축가의 건축설계사무소 '공간(空間)'의 사옥이었고, 현재는 아라리오 뮤지엄이 소유한 갤러리다. 프릳츠가 유리 건물 1층에서 빵을 굽고 커피를 내리면 손님들은 커피와 빵을 받아 건너편 한옥이나 중정의 야외 테이블에 앉는다. 나는 언제나처럼 크랜베리 호두 깡빠뉴를 두 개 집어 들고 커피를 주문한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테이블에 앉을 순 없지만, 잠시 방문한 것으로 충분히 만족한다. 프릳츠의 아이스라떼와 크랜베리 호두 깡빠뉴의 조합은 언제나처럼 환상적이다.


나에게 가장 맛있는 빵은 쾌락과 죄책감 사이에서 적당한 균형을 이루는 빵이다. 언젠가부터 다이어트에 대한 일종의 강박처럼 의식적으로 부드러운 흰 빵보다 당지수가 낮은 호밀빵을 선택해왔는데, 그런 오랜 습관은 나의 입맛과 취향이 되었다. 부드러운 흰쌀밥과 촉촉한 식빵보다 현미로 지은 거친 밥과 단단한 깡빠뉴(*뺑드 깡빠뉴: 불어로 ‘시골의 빵(pain de campagne)’이라는 뜻으로, 바게트가 보급되기 전 주식으로 먹은 식사용 빵. 장발장이 훔쳤다고 알려진 엄청나게 크고 딱딱한 그 빵 맞다)의 식감을 나는 더 맛있게 느낀다.


프릳츠의 빵은 탄수화물이 주는 쾌락과 죄책감의 상관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딱 알맞은 지점을 공략하는 저격수 같다. 과하게 달지 않아 부담이 덜하며, 너무 부드럽지도 딱딱하지도 않다. 구수한 맛을 베이스로 바삭하고 쫄깃하거나 아삭아삭한 식감을 잘 활용한다. 산뜻한 블루베리 알갱이가 가득 씹히는 블루베리 파이, 겹겹이 부푼 바삭한 페이스트리에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을 품은 뺑 오 쇼콜라, 단단한 크러스트 안에 촉촉한 속살을 숨긴 바게트를 모두 좋아한다. 하지만 베스트는 역시 크랜베리 호두 깡빠뉴다. 쫄깃한 식감, 씹으면 씹을수록 입안에 맴도는 크랜베리의 은은한 단맛과 호두의 기름진 고소함, 그을린 듯 바싹 구운 크러스트까지 완벽하다.

나의 크리스마스 간식

맛은 총체적 경험이다. 프릳츠의 빵에 유독 애착이 가는 건 오랜 시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쌓인 다양한 감정 때문일 테다. 토요일 아침 요가 수업을 마치고 상쾌한 기분으로 카페를 향하던 기억, 마감을 앞두고 빈 화면 앞에서 빵을 오도독오도독 씹던 기억, 바람이 살랑이는 가을날 참새가 앉은 카페 마당에서 함께 커피를 홀짝이던 기억이 모두 이 빵에 담겼다. 언제 가도 동일한 그 맛이 지금은 지나간 좋은 추억을 소환하고, 잊고 지내던 행복감을 무의식 가운데 두둥실 띄운다. 그리하여 프릳츠의 깡빠뉴는 내게 크리스마스 시즌에 한정 판매하는 케이크나 슈톨렌보다 더 특별한 간식이다.


크리스마스의 간식을 배불리 먹고 미뤄둔 일들을 하나씩 한다. 코인 세탁소에 가서 빨래를 돌리고 카톡으로 고마운 친구들에게 인사를 전한다. 답장 대신 걸려온 영상통화에 답을 하고, 힘든 시간에 예상치 못한 위로를 받았던 언니에게 달콤한 쿠키를 또 선물로 받았다. 저녁으로 냉장고에 남은 재료를 털어 파스타를 만들고 넷플릭스를 잠깐 보다가 엄마랑 통화를 한다. 연말과 연초는 가족과 함께 보낼 예정이라 본가에 내려갈 짐도 챙긴다. 아, 몇 년간 마음속으로 벼르던 브런치 작가에도 응모했다.


언제나 북적였고, 정신없던 크리스마스를 처음 조용히 홀로 보낸다. 나의 공간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운 온전한 나의 시간, 잔잔하고 충만한 나의 크리스마스는 이렇게 지나갔다.



 팀북투 산문 클럽

https://blog.naver.com/timbuktucl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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