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와 고통 사이에서
우리는 두 번의 세계 대전을 겪었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고, 우리의 일상과 함께 인간 가치의 정의와 존재의 숭고함은 잿더미 속에 묻힌 지 오래다. 인간은 ‘왜, 어떻게 존재하느냐’보다 ‘인간이 왜, 어떻게 존재할 것이냐’에 더 집중하는 사회가 되었다. 물론 인간 존재를 넘어서 존재 자체에 대한 정의가 인간의 감각적·의식적 한계에 부딪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음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도 우리는 고통과 인내보다 쾌락과 권태에 익숙해져 있기에, 그것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한 의식적 활동들이 더욱 중요한 사회가 된 것이다.
근현대에 들어 존재를 대체할 개념으로 등장한 ‘실존’이라는 개념은 이러한 시대를 여실히 보여준다. 어쩌면 실존이라는 개념의 등장이 우리를 현대로 이끌었는지도 모르겠다. 실존의 등장으로부터 이루어진 철학사적 흐름이 만들어낸 사회적 파장은 실로 대단했다. 사회를 구조로 파악하고 해체하는 과정까지, 우리가 알지 못했던 우리를 이끄는 거대한 힘의 흐름을 느끼게 했고, 그것들을 직접 분해하며 우리 의식이 일률적이고 단편적으로 감각하는 현상들을 다시 바라보게끔 했다. 이러한 모습들은 철학을 넘어 예술과 건축, 산업에까지 이르러(건축을 굳이 넣은 것은 예술과 산업을 이어주는 교두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 전반에 현대 철학적 씨앗이 널리 퍼져 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실존에 대한 철학적 시선은 다른 존재와 마찬가지로 우리 존재에 특별한 의미가 없음을 알기에 특별함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실존을 이루는 무수한 연결 속에서 연결됨의 따스함을 느끼라는 아름다운 시인의 노랫말로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선 앞서 말한 아름다운 실존은 존재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실존이란 그리 감상적이고 나풀나풀한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어떤 철학자는 인간의 실존이란 인간의 무한히 지속되는 외부를 향한 의식으로, 감각하는 것들을 끊임없이 정립하는 과정이라고도 한다. 이 과정은 인간이 스스로 멈출 수 없기에 저주에 가깝다고 말한다. 실존이란 끊임없이 지속되는 고통스러운 의식이다.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어쩌면 누군가의 이야기와 우리의 삶은 닮아 있지 않은가. 우리는 결국 개인의 의식이 선망하는 가치들을 끊임없이 욕망하고, 또 집단의 의식이 선망하는 또 다른 가치들을 욕망하길 권유받는다. 결국 인간 의식이 가지는 고질적인 문제의 구조 속에서, 고대 철학사부터 이어져 온 이데아를 향한 목표 지향적 인생관이 자리 잡은 것이다.
분명 실존은 인간 의식의 구조적 취약점을 설명했고, 그를 통해 이전과 또 다른 지향점을 선보이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이 예술, 철학, 건축, 산업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통용됨에도 의식의 구조 속에서 목표 지향적 인생관을 끄집어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이 본능적으로 선택하는 ‘집단’이라는 가치의 우월적 지위가 인간을 실존적 인물로 탈바꿈시키는 것을 거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우리가 집단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필요로 했던 가치 판단 체계와 그로부터 판명 난 수많은 가치들의 선형적 우위는 실존을 실존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든다. 더불어 현대 시민들은 실존에 대해 감상적 착각을 하며, 마치 실존을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중에 만나는 잠깐의 휴식처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집단 사회의 이데아적 가치와 현대 철학의 실존적 가치, 실제 통용되는 실존적 가치와 대중이 인식한 실존적 가치의 괴리 사이에서 우리는 길을 잃고 만 것이다.
현실이란 망망대해 속 맨몸으로 내던져진 인간이 방향을 잡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까. 우리를 감싼 집단 사회라는 테두리가 인간의 실존을 인정하고 배려한다면 더없이 좋은 마무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사회가 스스로의 생을 마감하며 인간에게 실존을 내어줄 이유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사회가 거부하는 실존을 스스로 붙잡아야 하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실존에 대한 이해는 인간을 더 행복하게 만들어 줄까? 이 물음은 글을 쓰는 나조차도 몇 번이나 주저하게 만들었다. 아마 아닐 것이다. 앞으로 우리의 삶은 실존에 대한 이해 여부와는 관계없이 계속해서 나아갈 것이다. 환경은 뒤바뀌고 새로운 고통과 희열이 찾아올 것이다. 그곳에서 인간이 느끼는 격렬한 감정의 틈바구니에 실존이 설 자리는 없다. 그러나 실존은 우리 앞에 펼쳐진 환경과 감정의 소용돌이를 마주할 용기를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대 철학과 이 사상을 이해한 일부 사람들은 이미 온 세상 도처에 실존을 붙들어 낼 실마리를 퍼뜨려 두었다. 철학 서적 속 무수한 용어와 개념들로 점철된 실존도 있을 것이며, 그것들을 풀어내어 예술로 승화시켜 스스로 생각하게 만든 것들도 있을 것이다. 안타깝지만 이보다 더 쉽게 제시된 실존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스스로 의식함으로써 실존은 그 의미를 갖는다. 누군가의 완벽한 해설 따위가 실존을 만들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것들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인문학을 배워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접하는 수많은 산업 디자인과 건축물, 그리고 예술 속에 실존적 자유에 대한 투쟁이 들어 있다.
고통에서 피워 낸 실존이다. 실존이란 사유의 끝에서 결국 인간은 삶의 이유를 찾고 있다. 과거에도 그렇듯 우리는 삶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결국 그것이 우리 삶의 이유로 충분한가?
나 또한 멈춰 있다. 실존에 대한 이해도, 삶에 대한 질문도. 허나 또 돌아올 것이다. 계절이 그러하고 시대가 그러하듯, 인간 삶에 대한 끝없는 고민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