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여는 준비
엄마의 아침은 약속이 없어도 화장으로 시작된다. 여든넷의 피부 위에 옅게 분을 바르고, 눈썹을 가지런히 정리하신다. 하지만 공들인 화장의 마무리인 입술만큼은 끝내 진하게 바르지 않으신다. 립스틱은 늘 손 닿는 곳에 놓여 있을 뿐이다. 그것은 연락이 오면 그제야 완성하겠다는 일종의 유보다.
언제든 부름이 오면 곧장 나설 수 있도록 남겨둔 마지막 여백. 엄마에게 화장은 외출을 위한 치장이 아니라, 삶을 향한 팽팽한 대기 상태다.
나이가 든다는 건 어쩌면 병문안이나 초상집처럼 슬픈 소식에 더 자주 불려가야 한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엄마는 혹여 그런 자리에서라도 허술한 모습으로 서고 싶지 않으신 게다. 슬픔의 자리일수록 더 단정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엄마가 평생 지켜온 삶의 방식이었다.
“나를 찾는 사람이 있고, 같이 밥 먹을 이가 있고, 내 발로 걸어갈 수 있으니 얼마나 고맙니. 연락이 오면 가야지.”
엄마에게 화장은 게으름을 밀어내는 채찍이자, 사람을 향해 마음을 여는 준비다.
사람을 의지하지는 않되, 사람을 향한 걸음은 멈추지 않는 것. 비어 있는 입술 위에는 언제든 응답하겠다는 생의 긴장이 조용히 머물러 있다.
어느 날, 지인의 퇴원 소식이 전해졌다. 그날 아침, 엄마의 손이 분주해졌다. 아침부터 정성껏 묵을 쑤고, 그릇에 담아 놓았다.
“한시간만 기다려라.”
자식에게 당당히 양해를 구한 뒤, 엄마는 분홍색 립스틱을 덧바르고 집을 나서셨다. 그날의 화장은 마침내 완성되었다.
잠시 후 돌아온 엄마의 얼굴에는 유난히 생기가 돌았다.
“이걸 여기까지 가져왔냐"며 미안해하더라
“그래도 잘 먹고 힘내야지, 빨리 나아야지.”
그렇게 서로를 다독이며 인사를 나누고 엄마는 집으로 돌아오셨다고 한다.
상대의 고맙다는 말 한마디가 엄마에게는 오래 남은 기쁨이었나 보다.
“늙고 아프면 밥심밖에 없지. 누가 뭘 좋아하는지 알면, 아플 때 그걸 꼭 해다 주고 싶어. 그래야 대접받는 기쁨으로 먹고, 마음속에 의미가 남거든.”
엄마에게 ‘맛있게 먹는 것’은 결코 비싼 음식을 뜻하지 않았다. 누군가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하며 정성을 다했다는 사실을 느끼며 먹는 것. 육체의 허기뿐 아니라 마음의 허기까지 함께 채워지는 것, 그것이 엄마가 말하는 진짜 밥심이었다.
평생을 단정하게, 그리고 타인을 향해 기꺼이 나설 준비를 하며 살아온 엄마. 그런 엄마의 등을 보며 내가 묻는다.
“엄마, 이제 엄마가 먹고 싶은 건 뭐야? 이번엔 내가 엄마한테 의미 있게 해줄게.”
우리는 마주 보며 웃었다. 엄마가 지인에게 전하고 온 그 분홍빛 생기가 거실에도 조용히 번져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알게 되었다. 사랑이란 언제든 달려갈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두고 부름을 기다릴 줄 아는 태도일지도 모른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