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냉장고

흐르는 사랑

by 라온제나

​엄마의 냉장고에는 보이지 않는 이름표들이 붙어 있다. 그 이름표들은 잠시도 가만히 머물러 있지 않는다. 큰사위를 위한 고기, 작은사위를 위한 생선, 며느리를 위해 따로 챙겨둔 나물과 과일들. 친구들을 위해 비축해둔 잣과 호두까지.

​“죽 쒀야 하잖아.”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엄마는 음식을 꺼내는 것이 아니라, 그 음식을 먹어야 할 사람의 이유를 먼저 꺼내 놓는다. 냉장고에서 무언가 빠지면 언니에게 연락이 온다. “그거 없어졌더라.” 그 말에는 ‘이제 올 때가 되지 않았니?’라는 다정한 호출이 섞여 있다. 엄마의 냉장고는 자신을 위한 저장고가 아니라, 나눠줄 이들을 위해 기꺼이 비워지기를 기다리는 대기실이다.


​그렇다고 엄마가 자신의 식사를 아무렇게나 하시는 것은 아니다. 자기 자신에게 주는 선물처럼 상을 정갈하게 차려 놓고 천천히 드신다. 그래서 엄마의 밥상은 늘 복되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설렘의 상이자, 동시에 자기 삶을 귀하게 대접하는 환대의 상이기 때문이다.


​엄마는 반찬을 담을 때도 결코 허투루 하지 않으신다. 혹여나 ‘늙은 사람 지저분하다’는 인상을 주어 받는 이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다며, 늘 새것처럼 매끄럽고 투명한 반찬통만을 골라 쓰신다. 그 반짝이는 통은 엄마가 자식과 손주들에게 보내는 가장 정중한 초대장이다. 주는 사람도 당당하고 받는 사람도 마음이 환해지는 그 그릇에는, 사랑을 전하는 순간만큼은 티 없이 깔끔하고 싶어 하는 엄마의 단정한 진심이 담겨 있다.


​“다 됐다. 내 나이에 누군가에게 음식을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기쁨인지 몰라.”

​빈 그릇을 보면 살아 있음이 고맙고, 누군가 먹고 간 흔적을 보면 하루가 헛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엄마.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 뒷좌석에는 엄마가 싸준 보따리가 묵직하다. 집에서 생선 냄새 나는 게 싫어 잘 구워 먹지 않는 딸을 위해 노릇하게 구워 은박지에 곱게 싸주신 생선, 막내 사위를 위해 끓여낸 김치찌개까지. 집에 도착해 냉장고를 열면, 텅 비어 있던 칸들이 엄마의 투명한 반찬통들로 차곡차곡 채워진다.


엄마의 냉장고에서 빠져나온 이름표들이 이제 우리 집 냉장고에 자리를 잡는다.

​문득 깨닫는다. 엄마의 냉장고는 고여 있는 저장고가 아니었다. 끊임없이 자식들에게, 이웃들에게 당신의 생기를 흘려보내는 사랑의 발원지였다. 그 물결은 언니네 집으로, 오빠네 집으로, 그리고 막내딸인 내 집 냉장고까지 쉼 없이 이어진다.


​엄마의 냉장고가 비워질수록 우리들의 냉장고는 배가 부르다. 엄마가 바른 분홍색 입술의 생기가, 정성껏 쑨 묵의 온기가 내 주방에도 가득 번진다. 냉장고 문을 닫으며 나지막이 읊조려 본다.

​“엄마, 잘 먹을게요. 지금처럼 그렇게 지켜줘서 참 고마워요. 덕분에 우리 집 냉장고에도 봄이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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