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제삿날은 늘 유난히 추운 날을 골라 찾아온다.
1월 8일. 그날도 한파였다.
머리맡의 스마트폰은 아침부터 재난 문자를 뱉어댔다.
눈을 뜨자마자 아들의 장난감에서 흘러나오는
요란한 동요가 고막을 찔렀다.
아내는 티비로 유튜브를 보고 있었다.
제사 장만을 위해
아침부터 10분 거리인 아버지 집으로 가야 했다.
하지만 몸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밤새 말 안 듣는 AI와 키보드 배틀을 벌인 탓이다.
5분만 더...
어제를 핑계로 뜨끈한 바닥에 누워
폰으로 의미 없는 스크롤을 내렸다.
그때 알고리즘이 뉴스 하나를 내 눈앞에 던졌다.
‘AI 국가대표 선발전’.
한국만의 독자적인 파운데이션 모델,
즉 ‘소버린 AI(Sovereign AI)’를 만들겠다는 소식이었다.
전문가들은 입을 모았다.
미국 테크 기업이 내일 당장 구독료를 올리거나
서비스 스위치를 꺼버리면 우리나라는 마비된다고.
그들의 데이터에 종속되지 않기 위해
수조 원을 들여서라도 '독립'해야 한다고 했다.
주권이란 결국,
남이 내 허락 없이 내 일상의 전원 버튼을
만지지 못하게 만드는 힘이었다.
국가는 수조 원을 들여 주권을 되찾겠다는데,
정작 나란 사람의 주권은 어떤 상태인가.
나는 방금 알고리즘이 추천해 준 뉴스를 읽었다.
내가 무엇을 읽을지, 무엇을 살지,
심지어 이 추운 날 무엇을 먹을지조차
알고리즘은 이미 계산을 마쳤다.
우리는 그들이 내놓은 선택지를 참고만 할 뿐.
스스로 결정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 선택권 또한
AI가 제시한 선택지 안에서 놀고 있다.
결국 우리는 AI가 정해준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는
성실한 구독자일 뿐이다.
내 삶의 데이터를
내가 소유하지 못하고 AI에게 의존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주권을 잃은 디지털 난민 아닌가?
쓸데없는 생각에 빠질 때쯤 아내가 이불을 잡아당겼다.
더는 밍기적거릴 시간이 없었다.
대충 씻고 아버지 집으로 향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할아버지의 제사를 지내는 일은 늘 의문이었다.
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누구도 뭐라 하지 않는 시대다.
효율과 합리라는 AI의 관점에서 보면,
추운 날 행해지는
이 비효율적인 의식은 '삭제 대상' 1순위다.
하지만 아버지는 꿋꿋이 장남으로서 제사를 선택했다.
장남이 아닌 나는 제사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됐지만,
아버지는 늘 나를 앉혀놓고
제사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으셨다.
지겨웠다. 살아서 잘할 것이지,
죽어서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매일 같이 툴툴거리며 비협조적인 나였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나는 아버지의 고집스러운 뒷모습에서
주권의 실체를 보았다.
남이 짜놓은 판(알고리즘)에서 내려와,
비록 춥고 고단할지라도
내가 옳다고 믿는 가치를 스스로 선택하는 행위.
이미 아버지는 묵묵히 제사상을 차리며
인간의 주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자신이 선택한 것이라 착각하며
알고리즘에 휘둘려 살아가는 대중보다,
아버지는 훨씬 더 독립적인 주권자였다.
소버린 AI를 부르짖는 전문가들보다,
아버지가 더 선명하게 주권을 증명하고 있었다.
주권은 화려한 기술력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인간의 주권은 그렇다.
인간의 주권은
'나의 선택'을 스스로 책임지겠다는
비효율적인 의지 속에 있다.
국가가 소버린 AI를 통해 기술적 독립을 꿈꾸듯,
나는 아버지의 제사상에서 인간의 실존적 독립을 배웠다.
제사상을 물리고 나면
남는 것은 늘 피곤함과 차가운 정적이다.
하지만 그 정적 속에 우뚝 서 있는 아버지를 보며
나는 살아있는 인간의 주권을 느꼈다.
그런 아버지를 보며 나도 오늘보다 조금 더 삐딱하고
정직한 주권자로 살아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