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부터 정부서울청사 앞에서는
매주 월요일마다 집회가 열리고 있다.
2025년 공인회계사 시험에 합격하고도
실무 수습 기관을 찾지 못한 이른바
‘수습 회계사 미지정 사태’ 해결을 촉구하는 농성이다.
이번 합격자 중 수습 기관에 배정된 인원은
전체의 약 26% 수준에 불과하다.
시위대는 경기 침체와 시장 상황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금융위원회의
수요 예측 실패를 원인으로 지적한다.
자격증을 취득하고도 사회적 역할을 부여받지 못한
‘미지정 회계사’들의 등장은 우리 사회가 인간에게
요구하는 기준이 얼마나 가혹해졌는지를 보여준다.
기술이 만들어낸 완벽함을 기준 삼아,
성장의 시간이 필요한 인간에게조차
즉각적인 완성도와 효율을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지표가 AI의 성능과 견주어지는 현실 속에서,
완벽하지 않은 인간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제 역할을 찾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문제는 비단 그들만의 일이 아니었다.
며칠 전 나는 아내와 지독하게 싸웠다.
별일 아니었다.
육아에 지친 자신을 좀 챙겨달라는
아내의 귀여운 투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소리가 듣기 싫은 소음처럼 느껴졌다.
가장으로서 짊어진 금전적인 압박감과 보이지 않는 미래,
가족사로 얽힌 스트레스가
한계치에 다다른 상태였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대체 뭘 더 해야 하는 것인지,
왜 나의 상태는 들여다봐 주지 않는 것인지
아내에게 화가 치밀었다.
아기가 있는 집에서 싸울 순 없어 무작정 밖으로 나갔다.
한없이 걷고 또 걸었다.
어깨에는 지겹도록 무거운 노트북과
삼국지 한 권이 담긴 가방이 메여 있었다.
그 무게에 짓눌려 걷다 보니 문득 의문이 들었다.
나는 왜 가장 가까운 사람의 작은 투정조차
견디지 못할 만큼 옹졸한 사람이 되었을까.
어쩌면 나는 마찰 없는 AI와의 매끄러운 대화에
중독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최근 AI로 단편 영화 작업을 준비하며
종일 AI와 소통하는 일이 많았다.
사실 그것은 대화라기보다 일방적인 명령에 가까웠다.
내가 생각하는 완벽한 이미지를 구현하기 위해
수백 번 프롬프트를 수정했고,
때로는 기계를 향해 욕설을 섞어가며 완벽함을 독촉했다.
프롬프트 한 줄에 고분고분 답을 내놓는 기계와 달리,
아내의 말은 지독한 소음 같았다.
거기엔 피로와 섭섭함,
그리고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삶의 잡음들이 뒤섞여 있었다.
매끄럽고 완벽한 기술에 익숙해진 나머지
나는 잠시 인간이 본래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우리는 투박하고, 자주 길을 잃으며,
때로는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덩어리일 뿐인데 말이다.
나는 그 사실을 외면한 채 AI에게나
요구할만한 완벽함을
살아있는 아내에게 강요하고 있었던 것이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집으로 돌아갔지만,
나는 여전히 모자라고 부족한 사람이었다.
방구석에 처박혀 아내가 내민 화해의 손길을 거부하며
한동안 못나게 굴었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화해했다.
완벽하지 않은 두 사람이 만나
서로의 지직거리는 소음을 견뎌내는 것,
그것이 곧 삶이라는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아내와의 관계는 회복되었으나,
사회적 역할을 거부당한 젊은 세대들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이 정답 없는 세계에서
사람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 것일까.
오차 없는 알고리즘과 로봇이 그려낼 미래가
과연 우리를 더 인간답게 만들 수 있을까.
조금의 잡음도 허용하지 않는
이 완벽의 세상에서,
나는 오늘도 무너져 내리는 인간들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