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길(9)

크리스마스트리

by 별의 여백

그날은 눈이 오지 않는 겨울의 한복판이었다.


북적거리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다녀도 온기 한 점 느껴지지 않던, 도시의 건조함을 머금은 칼바람이 빌딩 사이사이를 훑어내리던 날.


낯설고 무심한 이 도시에서 내가 맡은 마지막 일은 생각보다 간단하게 끝이 났다.


후련함인지 허탈함인지 모를 비어버린 무거운 마음을 들고, 쏟아지는 인파에 몸을 맡긴 채 흐르듯 빠져나온 대로변엔 온통 번쩍거리는 것 투성이었다.


나는 살짝 풀린 목도리를 다시 고쳐매며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유독 새카만 하늘 아래 삐죽 솟아있는 빌딩들.


유리창에 반사되어 날카롭게 눈을 찌르는 전광판의 어지러운 불빛들.


우르릉 거리는 자동차 엔진소리와, 그 옆을 빠르게 지나가는 서늘한 걸음들.


비행기를 타지 않고도 다른 나라에 온 것처럼, 사방이 어색하고 빽빽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 가운데서 할 일을 잃은 난 정처 없이 길을 걷기 시작했다.


발을 한 뼘 정도 띄우고 낯선 이들의 걸음에 매달려 흘러가듯 아슬한 기분으로, 한참을 걷고, 또 걷고.


그 사이 딱딱한 신발에 묶인 발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나는 길 한쪽으로 비켜나 절로 나오는 한숨을 뿌연 입김에 담아 길게 내뱉어보았다.


화면이 휙휙 바뀌는 건너편의 거대한 전광판처럼, 삶도 정해진 화면처럼 휙휙 넘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장갑을 끼지 않은 시린 손 끝의 감각을 타고, 이 막막한 방황을 오늘로 끝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묵직하고 허전한 마음을 날카롭게 찔러왔다.


나도 모르게 발 끝으로 맨바닥을 툭툭 건드리자, 신발 앞 코에 작은 생채기가 몇 개 새겨졌다.


그 흔적을 잠시 내려다보다, 어디선가 휑하니 불어오는 찬 바람에 코트 앞섶을 단단히 여미고 다시 흐르는 인파 속에 머뭇거리며 몸을 실었다.


어디선가 들려오던 겨울 노래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곳엔 노랗고 자잘한 전구를 두른 커다랗고 화려한 크리스마스트리와 반짝거리는 장식이 가득했다.


어느 유럽의 장난감 가게처럼 꾸며진 공간과 움직이는 병정들, 춤을 추는 테디베어.


겨울의 찬 바람이 그곳만은 피해 가는 듯 소란하게 번화한 백화점 앞 작은 광장에는, 따뜻한 감정들이 조명에 반사되어 무수히 산란하고 있었다.


나도 뭉근한 그 틈에 섞여 카메라를 높이 들어 올려보았다.


찰칵- 하는 첫 번째 셔터음에 작은 손가락으로 트리 꼭대기를 가리키는 어느 아기가 담겼다.


주위의 사람들도 왁자지껄한 웃음을 흘리며 꼭대기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웃음소리에 잠겨 작게 들리는 두 번째 셔터음엔 타이밍을 놓쳐 잠시 꺼져버린 어두운 트리가 찍혔다.


여기저기서 앗-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다 갑자기 터져 나온 감탄사에 완전히 묻혀버린 마지막 셔터음에, 마침내 별빛을 휘감은 듯 반짝거리는 트리가 아로새겨졌다.


나는 휴대폰을 내려 손 위에 떠오른 작은 크리스마스를 바라보다가, 더 아래쪽으로 시선을 옮겨 상처 난 신발을 내려다보았다.


파여버린 생채기 사이로 반짝이는 조명이 파고드는 것 같았다.


꽤 오랫동안, 더 짙어 보이는 그것을 빤히 바라보다, 갑자기 시려오는 코 끝을 감추려 목도리를 추켜 올렸다.


그리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나의 표정을 그 안에 파묻은 채, 사람들 사이를 조용히 빠져나왔다.


모퉁이 하나를 돌았을 뿐인데, 날이 선 바람이 맨 살 틈을 파고들었다.


나는 따가워지는 얼굴을 목도리에 더욱 파묻고,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홀로 배웅할, 나의 마지막을 보낼 숙소가 부디 따뜻하기를 바라면서.



** 다음 파트부터는 산책 2부에서 진행됩니다.


이전 25화동네길(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