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는데 나는 또 도망쳤다

by toddle

정확히 언제 어쩌다 번역가라는 직업을 고려하게 됐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회사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뭐 할 게 없을까 생각하던 중 그나마 할 수 있을 것 같았던 게 번역가였던 것만 생각난다. 그래도 내세울 건 영어밖에 없는데 통역을 하기에는 영어로 말하는 게 너무 자신 없었고 번역이면 그래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솔직히 말하면 번역이나 해볼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번역에 접근했다. 많은 번역가가 질색할 말인데. 나도 번역가가 되기 전에는 번역이 어떤 건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그래서 그렇게 가볍게 접근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때 나에게는 돌파구가 필요했다. 회사생활이 즐거울 때도 있었지만 나는 대체로 우울과 무기력에 빠져 있었다. 이런 삶이 계속된다고 생각하면 끔찍했다. 정말 이게 다일까, 다른 길은 없는 건가. 아무리 머리를 굴러봐도 회사원 외에 길이 보이지 않았는데 이대로는 못 살겠어서, 정말 살기 위해서 뭐라도 찾다가 발견한 게 번역이었다.


번역가는 어떻게 되는 건지 알아보다가 번역아카데미를 알게 됐다. 아무 경력도 없는 상태에서 첫 데뷔가 가장 어려울 것 같은데 수료하면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서 그걸 믿고 번역아카데미에 등록했다. 회사를 다니면서 번역 수업을 들으러 다녔다.


막상 배워보니 번역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그래도 수업이 재미있었고 과제를 할 때는 힘들기도 했지만 그게 싫지 않았다. 영어에 스트레스받아도 사실 영어를 듣고 읽는 건 좋아했고 책도 꾸준히 읽는 편이었으니까 잘 맞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회사생활에 지쳐 있고 자유를 갈망하던 내게 번역은 혼자서 자유롭게 하는 일이라는 게 매력적이었다.


오랫동안 길이 보이지 않아 절망했는데 드디어 길이 될 만한 무언가를 찾았다. 살 길이 보이는 것 같았다. 어떤 번역가였는지 번역가지망생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안 나는데 아무튼 그 사람은 번역이 너무 즐거워서 회사생활도 견딜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그렇지 않았다. 살 길이 보인 다음에는 그리로 당장 도망치고 싶은 마음만 들었다.


번역이 너무 좋고 번역가가 너무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번역이 어떤 건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그때 그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어서 번역에 발을 들였다. 당시 내게 번역은 정말 하고 싶은 일이라기보다는 그나마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일에 가까웠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회사를 그만둘지 말지 고민할 때 가장 두려운 것 중 하나는 '이것도 나한테 안 맞으면 어쩌지?'였다. 그 회사에 들어간 것도 정말 운이 좋아서였고 이제 또 그만두면 다시 취업하기는 더 어려워질 게 뻔했다. 번역을 공부하긴 했지만, 또 과제로 검토서로 조금씩 해봤지만 데뷔하기 전이었고 내가 번역가로 살 수 있을지, 번역이 정말로 나한테 맞는 일일지 확신할 수 없었다.


매일 그만둘까 말까 저울질하며 보냈다. 한시라도 빨리 회사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싶다가도 보장된 연봉과 안정적인 생활을 내팽개치기가 겁났다. 이래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이러다 망하면 어떻게 하지. 그때는 더 답이 없어지는 거 아닌가. 어떨 땐 충동적으로 질러버리면서 또 한편으로는 겁이 많아서 온갖 불행의 시나리오를 써가며 불안해했다. 회사를 그만둔다는 결정이 내 인생을 좌우할 것만 같았다. 여기서 잘못된 선택을 하면 완전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살면서 하는 수많은 선택 중 하나였을 뿐인데. 엄청난 무언가로 만들어서 스스로를 괴롭혔던 것 같다. 과거의 나를 돌아보면 참 많은 순간 내가 안타깝다.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데. 참 쓸데없는 걱정을 많이 했다. '어떻게든 되겠지'가 안 되는 성격이었다. 끊임없이 불안에 떨었다.


한편으로는 나는 왜 이런 것도 못 견디나 자책했다. 힘든 일이 있으면 헤쳐나가기보다는 도망갈 궁리만 하고. 생각해 보면 인생이 회피였던 것 같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는데 나는 번역으로 도피하고 싶었다. 번역 자체가 너무 좋았다면 나도 회사생활을 더 하면서 더 안정적으로 살 수 있었을까. '번역이 하고 싶다'보다는 '회사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적어도 데뷔할 때까지만이라도 버티자 생각했는데 결국 못 버티고 데뷔하기 전에 그만두고 말았다. 그렇게 찾던 도망칠 길이 드디어 보이는 것 같으니 오히려 더 견디기 힘들었다.


결국 나는 회사에서 더 버티는 게 이성적인 선택이라는 걸 알면서도 도망치고 말았다. 처음에는 도망친 곳이 낙원 같았다. 회사에서 벗어나니 이렇게 좋구나 싶었다. 숨통이 트였다. 하지만 역시 도망친 곳도 낙원은 아니었다. 지금도 도망친 게 잘한 건지 잘 모르겠다. 그때 난 어떻게 해야 했을까. 더 버텼어야 했을까. 그래도, 다시 되돌아간대도 도망치는 쪽을 선택할 것 같기는 하다. 현명하지 못한 선택일지 모르지만 더는 버틸 수 없었으니까.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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