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는 평범하게 살기 싫었다. 지금은 평범은 닿으래야 닿을 수 없는 게 되어버렸다. 평범에 한참 못 미치는 삶. 어쨌든 나는 평범하지 않게 살고 있다. 내가 생각한 것과는 아주 다른 '평범하지 않음'이지만.
나는 내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았다. 당연히 평범보다 훨씬 나은 삶을 살 줄 알았다. 그 착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서, 착각인 걸 어렴풋이 느끼면서도 인정할 수가 없어서 오랜 시간을 허비했다.
내가 허비한 그 세월에 의미가 있을까. 그냥 흘려버린 시간. 아무것도 한 것도, 이룬 것도 없는 시간. 어릴 때는 모든 일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좌절을 반복하고 나니 의미 따위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해낸 건 그래도 살아있는 거. 그게 다였다. 죽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막상 실행에 옮길 용기도 없었으므로. 나를 한심해하고 미워하고 증오하고 그러면서 그냥 살아만 있었다. 시간을, 세월을 그저 흘려보내면서. 그래도 살아있을 수 있었던 건 내가 지금 이렇게 한심하고 비참해도 사실 나는 특별한 사람이라는 착각 덕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건 양날의 검이었다. 그래도 나는 특별하다는 생각이 나를 버티게도 해주었지만 특별한 사람이 되지 못하는 나를 더 증오하게 만들기도 했다.
내가 특별하다는 생각, 특별한 사람이 돼야 한다는 생각은 어느 정도 부모님 영향도 있었던 것 같다. 부모님은 여느 부모가 그렇듯 자식에게 기대를 걸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잃었던 아빠는 공부를 제대로 못 한 게 한이었고 자식들이 그 한을 풀어주길 바랐다. 어릴 때는 단칸방에 살 정도로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고 그래도 부모님이 고생한 덕에 아파트로 이사할 수 있었지만 그만큼 부모님은 고생하셨다. 그래서 나는 이상한 책임감과 죄책감을 안고 있었다.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해야, 부모님의 희생에 보답해야 할 것 같았다. 부모님이 나에게 기대를 거니까 내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았고 부모님이 자랑스러워할 뭔가가 돼야 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부모님이 엄청 압박을 줬던 것도 아니고 나도 그렇게 순순히 부모님 말을 잘 들은 것도 아니었는데도 항상 죄책감과 책임감을 갖고 있었다. 나중에는 그 죄책감을 분노로 덮기도 했다.
성인이 되고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나는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됐다. 그게 정말 어른이 된다는 건지도 모르겠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더는 흐린 눈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걸 받아들이지 않으면 제대로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그 착각을 내려놓았을 때 내 안의 무언가가 죽어버린 느낌이었다. 그때까지 나를 지탱해 주었던 무언가가, 붙잡고 있던 썩은 동아줄이, 그래도 쥐고 있던 지푸라기가 사라져 버려 기댈 곳 하나 없는 끝없이 펼쳐진 사막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었다. 뭘 붙잡아 보려고 해 봐도 손틈 사이로 새어나가는 모래와 나를 흔드는 바람뿐인 사막에. 그렇게 막막했다. 아무런 목표도 희망도 없이. 지금 생각해 보면 거쳐가지 않을 수 없는 과정이었지만 그때는 정말 힘들었다.
모든 기대와 희망을 내려놓았다. 그랬더니 무기력해졌다. 이제 내게 남은 게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그래도 그전에는 덧없는 희망이라도, 허망한 목표라도 있었는데 이제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특별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되고 싶은 것도 없었다. 회사에 있을 때가 아니면 집에서 침대에 늘어져있었다. 손 하나 까딱하기 싫었다.
다른 사람들이 신기했다. 자기계발하고 재테크하고 이런저런 활동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대체 어디서 저런 에너지가 나는 걸까 생각했다. 나는 에너지가 너무 없어서 돈을 더 벌고 싶지도, 뭘 더 잘하고 싶지도 않은데. 아니 그냥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데.
그래도 그 와중에도 했던 게 덕질과 피아노였는데 그게 내 나름의 살아가려는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한동안은 무언가를 꿈꾸거나 바라는 거 자체가 두렵기도 했다. 그런 게 다 부질없게 느껴지고 어차피 안 될 거라는 생각만 들고. 또 실패하고 실망하는 게 두려웠다. 더는 뭘 시도할 힘도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무기력하고 공허하고,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게 참 괴로웠다. 그런데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은 그게 좀 괜찮아졌다.
내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는 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게 어떻게 보면 위안일 수도 있다고, 꼭 특별해야 하는 게 아니고 뭐가 돼야 하는 게 아니라고, 그냥 아무것도 아닌 나로 살면 된다고. 요즘은 그렇게 생각한다.
지금도 약간 무기력하다. 큰 욕심도 목표도 없다. 예전엔 세계 곳곳을 다니고 싶었는데 이제는 여행도 귀찮다. 그냥 지금 하는 일로 먹고살 수 있으면 좋겠다. 이 이상 더 애쓰지 않고 살 수 있으면 좋겠다.
오래도록 나는 계속 무언가가 되려 했다. 지금의 내가 아닌 무언가. 더 특별하고 잘난 나. 근데 이제는 그런 발버둥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고시를 포기한 순간부터 회사를 다니면서 방황했던 그 모든 순간이 내가 특별하지 않다는 걸 받아들이는 과정이었다. 내가 그냥 흘려보냈다고 생각하는 그 시간의 의미가 이거였을까.
아직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못하지만 이제는 다른 무엇이 되려 하지 않는다. 내가 조금은 어른이 된 걸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무기력한 것뿐인지도 모르겠다.